도둑[유춘희]
경계 안쪽으로 그가
살금살금 기어 들어왔다. 성공적으로
문을 따고 깊게 들어와서
두리번거렸다. 주인이
비워놓은 시간에의 완전한 잠입, 일순
날은 어두워졌고 나도
함께 어두워졌다
내 안의 전부를 그는
만지작거렸다. 보이지 않는 것
숨겨놓은 것들을 들쑤셨다. 취약 부분을
뒤적였고 뒤적이는 곳마다 나는
취약했다. 초범이 아닌 듯 그는 결코
무거운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백주 대낮 환하디
환한 시간의 경계 허물고
뒤적이다 가버렸다. 헝클어진
몸에 빨대를 꽂고 밑둥까지
들이켠 후 훔쳐낸
젊음을 어깨에 둘러메고 그는
걸어나갔다. 도난 당한 한 도막의 시간을
다른 시간들이 쑥덕거렸다.
고통은 깊고 시간은 잠깐이었다. 상처 난
바람 하나 열린 문 찌걱찌걱 흔들어주었다.
* 나의 물건을 훔쳐간 도둑은 밉겠지만
내 집에 들어와 무겁지 않은 글들을 뒤적이다 가면 얼마나 정겨운가.
내 서랍에 몰래 들어와 허브큐를 먹다간 생쥐도 귀여운데
내 집에 들어와 댓글까지 남기면 얼마나 고마울건가.
바람처럼 열린 문 찌걱찌걱 흔들어도 좋으니 고마운 도둑이 되어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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