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도둑[유춘희]

JOOFEM 2006. 4. 6. 13:30

 

 

 

 

 

 

 

 

 

 

 

 

 

 

 

 

 

 

 

 

 

 

 

 

 

 

 

 

 

 

 

 

 

도둑[유춘희]

 

 

 

 

경계 안쪽으로 그가

살금살금 기어 들어왔다. 성공적으로

문을 따고 깊게 들어와서

두리번거렸다. 주인이

비워놓은 시간에의 완전한 잠입, 일순

날은 어두워졌고 나도

함께 어두워졌다

 

내 안의 전부를 그는

만지작거렸다. 보이지 않는 것

숨겨놓은 것들을 들쑤셨다. 취약 부분을

뒤적였고 뒤적이는 곳마다 나는

취약했다. 초범이 아닌 듯 그는 결코

무거운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백주 대낮 환하디

환한 시간의 경계 허물고

뒤적이다 가버렸다. 헝클어진

몸에 빨대를 꽂고 밑둥까지

들이켠 후 훔쳐낸

젊음을 어깨에 둘러메고 그는

걸어나갔다. 도난 당한 한 도막의 시간을

다른 시간들이 쑥덕거렸다.

고통은 깊고 시간은 잠깐이었다. 상처 난

바람 하나 열린 문 찌걱찌걱 흔들어주었다.

 

 

 

 

 

* 나의 물건을 훔쳐간 도둑은 밉겠지만

  내 집에 들어와 무겁지 않은 글들을  뒤적이다 가면 얼마나 정겨운가.

  내 서랍에 몰래 들어와 허브큐를 먹다간 생쥐도 귀여운데

  내 집에 들어와 댓글까지 남기면 얼마나 고마울건가.

  바람처럼 열린 문 찌걱찌걱 흔들어도 좋으니 고마운 도둑이 되어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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