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 아직도 나의 마음에는 젊은 날의 낙엽이 버석거리고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엽서가 지워지지 않은 채
사랑이라는듯 꼬깃꼬깃 접혀져 있다.
가을은 늘 그렇게 소리내어 알린다.
시끄러운 전령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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