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생각[나희덕]
밥 주는 걸 잊으면
그 자리에 서곤 하던 시계가 있었지
긴 다리 짧은 다리 다 내려놓고 쉬다가
밥을 주면 째각 째각 살아나던 시계,
그는 늘 주어진 시간만큼 충실했지
내가 그를 잊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지만
억지로 붙잡아두거나 따라가려는 마음 없이
그냥 밥 생각이나 하면서 기다리는 거야
요즘 내가 그래
누가 내게 밥 주는 걸 잊었나봐
깜깜해 그야말로 停電이야
모든 것과의 싸움에서 停電이야
태엽처럼 감아놓은 고무줄을 누가 놓아버렸나 봐
시간은 흘러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냉장고의 감자에선 싹이 나지 않고
고드름이 녹지 않고 시계바늘처럼 매달려 있어
째각 째각 살아있다는 소리 들리지 않아
반달이 보름달이 되고 다시 반달이 되는 것을 보지만
멈추어버린 나는 항상 보름달처럼 둥글지
그러니 어디에 부딪쳐도 아프지 않지 부서지지 않지
내 밥은 내가 못 주니까
보름이어도 나는 빛을 볼 수 없어
깜깜해 그냥 밥 생각이나 하고 있어
가끔은 내가 밥을 주지 않아서 서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지
밥을 주지 않아도 잘 가는 시계가 많지만
우리가 이렇게 서버린 건 순전히 밥 생각 때문이야
밥을 주다는 것은 나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가 감아준 태엽마다 새로운 시간을 감고 싶으니까
그 때까진 停電이야 停戰이라구, 이 구식 시계야
* 째각째각째......
호흡이 멈추면 그것은 곧 죽음.
누군가 밥을 주지 않아서 생명이 멈추면
정적속에서 멈추어버린
바람같은 것.
밥은 사랑이고 생명이고 호흡이고
멈추지 않는 바람같은
무질서, 아니 욕망.
매일매일 당신을 사랑하므로
나를 사랑하므로
밥을 준다, 밥을 받아 먹는다.
기다려, 밥줄께.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늑막염[강인한] (0) | 2006.09.22 |
---|---|
가을의 노래[유자효] (0) | 2006.09.20 |
마음의 서랍[강연호] (0) | 2006.09.15 |
박희진 (0) | 2006.09.08 |
가을에는[최영미] (0) | 2006.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