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강가의 사시나무 [정지웅]
그래 아직은 행복하구나
네 그루터기에
부모 없는 잡풀 몇 키우고 있구나
호주머니에 숨어있는 한 가계의 벌레들
잎사귀에 재우고 나뭇가지에 앉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모두들 잘 보살펴 주었구나
작년부터 꽃 피우지 못하여
영양제 꽂고 긴 겨울을 나더니
올해도 꽃 한 송이 없이 낙엽만 태우고
지붕 없이 살아가는 새들의 엄마가 되었구나
산다는 것은 숨이 내려앉는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목숨들을 껴안고 사는 일
죽어서도 발끝을 모아
가까운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었구나
수면 위에 배 한 척 떠 있지 않아도
강물은 흐르고 갈대는 손을 흔든다
어름치는 네 머리 위를 지나 떨어진
가슴 뜨거운 별을 남몰래 주어 먹고
나는 떨어지는 낙엽들을 주어다
세상 슬퍼하는 사람들과 빵을 구워야겠다
잃어도 모든 것이 온전할 사시나무여
눈 내리는 캄캄한 밤이 오면
너의 가지마다 살찐 빵을 달아주어야겠다
2005년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가작
* 일천구백칠십오년, 식목일에 즈음하여 아버지는 묘목 한그루를 내게 주셨다.
이름이 은수원사시나무라 하였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 기증하라는 거였다.
통장이던 아버지는 분명 동사무소에서 나누어준 묘목 가운데 한그루를 주신 게다.
어린 나이지만 학교에 가서 번거롭게 선생님에게 드리고 칭찬받는 일이 싫었다.
선생님이 좀 생뚱맞아 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뒷산 어디엔가 심어졌을 그 나무, 지금쯤 꽤 큰 나무가 되었을 게다.
벌써 삼십년이 넘었으니 말이다.
'산다는 것은 숨이 내려앉는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목숨들을 껴안고 사는 일'이란다.
허접했던 과거의 일들이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그것조차 삶의 한 단편임을, 또 껴안고 있어야 할 나의 일부분임을 깨닫는다.
망각이란 이름 뒤에 기억이라는 온전한 나무가 떡 버티고 서 있다.
은수원사시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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