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병 팔러 가셨다[임희구]
아들 출근하고 나면 술자리가 길어져 새벽에야 돌아오면
일이 겹쳐 이삼일씩 근무하고 오면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
독거노인처럼 혼자 지내신다
혼자 주무시고 혼자 일어나시고 혼자 씻으시고 혼자 아
침상 차리시고 혼자 식사하시고 혼자 설거지하시고 혼자
소화시키시고 혼자 티브이보시고 혼자 생각하시고 어떤 날
은 기운 없어 문밖도 못 나가시니 혼자 마냥 누워계시고
간간이 걸려오는 먼 자식들 안부 전화 혼자 쓸쓸히 받으시
고
현관에 빈 술병들이 모여 있다 날마다 혼자인 듯 사시는
어머니 빈병 모아 놓으셨다 자식들이 몇이나 있는데 혼자
사시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 왜 왜 그러시냐고 하숙생 같은
놈이 어머니께 잔소리를 하고나니 화가 나고 풀이 죽고 부
끄럽고 기가 막힌 밤
어머니 병 주워 오시면서 슈퍼에 다녀오시면서 연골 다
삭아 아픈 다리 운동이라도 하시라고 망망한 고독 한 귀퉁
이라도 아들 같은 빈 술병들로 달래시라고 이튿날 퇴근길
단지를 한 바퀴 돌아 소주병 몇 개 주워왔다 침대 위에서
종이퍼즐을 맞추고 계시다가 웬 병이냐, 며 반기신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머니 病 팔러 가셨다
* 어버이날이라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모기만한 목소리가 아픈 기운이 역력했고
혹시라도 자식이 걱정할까 걱정하며 아니야, 괜찮아
손사래치듯 하신다.
다른 날 혼자인 것은 쓸쓸치 않으나
무슨 날에 혼자이면 참 쓸쓸할 것 같아
조퇴하고 안양을 올라갔다.
왜 왔니, 하시면서도 기분은 좋으신 듯 하다.
죽을 사가려고 했으나 가난한 안양에 죽집은 없었다.
참외 몇 개 사들고 가서
참외 깎아 먹고
어머니가 해 주시는 단호박 찐 것과
김치말이국수를 먹으며
어머니가 자식에게 사랑을 베푸는 은혜를 누리게 하였다.
혼자 주무시고 혼자 식사하시고 혼자 생각하시는 그 긴긴 시간에
당신은 얼마나 그 은혜를 사모하였던 것일까.
기분 좋아졌어, 우리 어머니.
형수가 다녀가고 작은 아들이 다녀갔으니
기분 좋아졌어, 우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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