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바님을 위한 유상의 벤치
노을과 대화하는 사내 [김재혁]
그에겐 벤치가 삶의 버팀목이다
그에겐 저녁노을이 옷자락이요
자신의 혀를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지나가는 여학생의 몸매를 훑는
그의 눈엔 가끔 빗물이 어리기도 하지만
그의 입술에서는 불경(佛經)이 단풍잎처럼
바람에 불려 떨어지다
다시 바람을 타고 올라가
서녘 하늘에 가서 붉은 노을이 된다,
저녁공기 속엔 추억이 알알이 배어 있는지
아작아작 씹어대는 그의 입안엔 군침이 돌고,
저물어가는 가을 햇살을 쪽쪽 게맛살처럼
찢어먹는 그에게선 욕설의 향기가 풍긴다,
그가 한 장의 저녁노을이 되어
바람에 흩날릴 무렵
그의 눈엔 커다란 연못이 생기고
떨어지는 가을 나뭇잎 몇 개가 파문을 일으킨다,
나는 그 연못을 첨벙첨벙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누가 물어뜯었는지
저녁놀의 한 귀퉁이가 헐어 있다
* 블로그산책중에 퍼온 시.
이 시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선배가 한사람 있다.
본교와 떨어져 있는 이공대캠퍼스는
본교처럼 고풍스럽지도 않고
벤치에 앉아있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ㅈ유상이라는 칠육인지 칠팔인지 선배는
늘 외딴 곳에 있는 벤치에 딱 붙어있었다.
빈강의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나 그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상념에 잠기거나
혹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벤치에 감히 다른 사람은 앉지 않았었다.
우리는 그 벤치에 이름을 지어주었고 '유상의 벤치'라 불렀다.
본교처럼 지나가는 여학생의 몸매를 ?을 여건이 안되는
삭막한 곳에
그나마 유상의 벤치가 낭만이라면 낭만이었던 게다.
가을날 그 벤치에 앉으면 바람에 춤추는 잎사귀들의 아우성과
저녁 햇살자락이 교감하며
쓸쓸한 캠퍼스를 캠퍼스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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