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신지혜]
바지랑대 높이
굵은 밑줄 한 줄 그렸습니다
얹힌 게 아무것도 없는 밑줄이 저 혼자 춤춥니다
이따금씩 휘휘 구름의 말씀뿐인데,
우르르 천둥 번개 호통뿐인데,
웬걸?
소중한 말씀들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본시부터 비어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
조용하고 엄숙한 말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지요
잘 삭힌 고요,
空의 말씀이 형용할 수 없이 깊어,
밑줄 가늘게 한 번 더 파르르 빛납니다
바지랑대[김미선]
고향집 마당가를 가로지른
빨랫줄에 팽팽하게 매달린 바지랑대
매달린 하얀 빨래가 온종일 조잘대며
춤추며 노래하며 옛이야기 들려주며
땡볕으로 건너올 희소식을 기다린다
늘어진 양말이나 여인의 속옷들이
윗도리 소매가 해풍에 펄럭거리며
떠나는 연락선에 손을 흔들어 보내고
어서 오라 고갯짓 하며
수 갈매기와 내통을 할 때가 있다
저녁답이면 까슬까슬하게 마른 빨래는
바다에서 돌아오는 만선들을 반기고
고향 어머니와 바다가 그리워지는 저녁
나의 일기장 속에 숨은 기억이 뛰쳐나와
바지랑대 끝에 잠자리처럼 앉는다.
방학[주페]
바지랑대 고추잠자리
하늘을 쳐다보아요
동그란 눈으로 동그랗게 쳐다보아요
여름방학이라고 친구를 기다리나 보아요
그림일기를 다 쓰고 쳐다보아도
바지랑대 고추잠자리
날아가지 않네요.
* 일천구백 팔십일년 칠월 삼십일 강원도 평창군 ㄱㄱ리 마을 소식지에
빈 칸 메꾸느라 실었던 동시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체칠리아님의 블로그를 방문하니 바지랑대[김미선]가 깔끔하게 세워져 있었다.
문득 신지혜님의 밑줄이 생각나고
일천구백팔십일년의 여름방학이 생각났다.
화전민마을에서 등사기로 만든 마을소식지도 생각나고
검은 옷 입은 아저씨들이 검열한답시고 소식지를 거두어 간 일도 생각난다.
아마도 최전방에서 암호, 바지랑대! 하면 고추잠자리!하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세상에 별반 집착할 일 없어
비만하지 않고 언제나 가벼운 몸,
날개로 춤추게 하며
역시 빈 말씀으로 밑줄 그은 하늘에
응시하고 또 응시하며
고요 하나 잘 삭히고 있다.
하늘이 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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