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어느 밤의 누이[이수익]

JOOFEM 2008. 1. 30. 21:20

 

 

 

 

 

 

 

어느 밤의 누이[이수익]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한 잠의 여울을 건너고 있다.

 

밤도 무척 깊은 귀가길,

전철은 어둠 속을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해쓱하게 야윈

핏기없는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이종사촌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 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에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

송두리째 넋을 잃고 잠들어 있다.

 

어쩌면 이런 시간쯤의 동행이란

천 년만큼 아득한 별빛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잠시 내 어깨를 빌려주며

이 낯선 여자의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전철은 몇 번이고 다음 역을 예고하며

심야의 지하공간을 달리는데...

 

 

 

 

 

 

 

 

* 낯선 여자가 묵직한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 채 잠이들었다.

  이종사촌 누이같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볼 수 없는 위치이므로

  그저 예쁘게 생겼을 거야, 알퐁소 도데의 소설에 나오는 소녀 혹은

  황순원의 소설에 나오는 잔망스러운 소녀같을거야,

  잔뜩 부푼 기대로

  저린 어깨는 견디어 냈다.

  남자 형제들 가운데에서 자라 누가 내게 오빠라고 불러주는 누이는 없었다.

  학교 다닐 때에조차 후배 여학생들은 형,이라 불렀다.

  이 침흘리며 자는 낯선 여자는 화들짝 놀라 깨어나면

  미안해요, 오빠,라고 말하고 아득한 별빛을 내밀려나.

  에구, 어깨 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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