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속의 여자 [이명윤]
‘선생님, 듣고 계세요?’‘ .......네’ 나와 처음 통화 하는 당신은 그날 고개 숙이던 면접생이거나 언젠가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시 부문 수상작 * 직장에서 받는 전화는 업무외적인 것도 상당하다. 보험회사, 핸드폰회사, 대출상담, 잡지구독, 보이스피싱,,,,, 대체로 똑같은 톤으로, 축하드립니다. 우수회원이라서 전화드렸습니다. 난 별로 우수한 사람도 아닌데 띄워주기까지 한다. 결론은 늘 버킹검이어서 하여튼 돈과 관련된 상업성전화가 대부분이다. 벽보고 며칠을 연습해서 오늘 처음 나왔다는 여자 마감날인데 하나도 실적이 없으니 도와달라는 여자 서툰 한국말로 띠엄띠엄 말하며 검찰에 출두하라는 여자 그리고는 바로 옆 동료에게 또 전화를 거는 머리 나쁜 여자...... 나도 이젠 닳고 닳아 이렇게 응대한다. - 아, 녜. 지금 회의중입니다. - 미안합니다. 다른 거 구독중이거든요. 다음에 전화 주세요. - 됐거든요. - .......(딸깍) 수화기 속의 여자와 교감하는 일은 서로 닳고 닳아서 아무 재미 없다.
어디서 잘라야 할 지 난감합니다, 두부처럼 쉽게 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어딘지 서툰 당신의 말, 옛 동네 어귀를 거닐던 온순한
초식동물 냄새가 나요 내가 우수고객이라서 당신은 전화를 건다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수고객이었다가 수화기를 놓는 순간 아닌,
우린 서로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번 보험 상품으로 말씀 드리면요’
식당에서 혼이 나던 종업원이거나 취업신문을 열심히 뒤적이던 누이.
당신은 열심히 전화를 걸고 나는 열심히 전화를 끊어야겠지요. 우린
각자 열심히 살아가야 하니까요. 어떡하면 가장 안전하게, 서로가 힘
빠지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을까요? 눈만 뜨면 하루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어야 하는 당신. 죄송합니다. 지금 저 역시 좀처럼 대답없는
세상과 통화중입니다. 뚜뚜뚜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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