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꽃잎이 피고 질 때면[김혜순]

JOOFEM 2008. 5. 24. 00:32

 

                                                                                       Eye of the Needle[Vladimir Kush]

 

 

 

 

꽃잎이 피고 질 때면[김혜순]

 

 

 

 

  꽃잎 돋으면 어쩌나. 가려워 어쩌나. 봄이 왔다고

산천초목 초록 입술 쫑긋 내미는데 이제 어쩌나. 당

신들의 들러붙은 무릎 사이. 당신들의 맞붙은 입술

사이. 세상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 비집고 이파리 돋

아나는데 어쩌나. 나 엎드려 기어가서 이 초록 벌판

다 짓이겨버리려네. 이 환한 초록 바다. 깊은 구멍

다 메꿔버리려네. 초록 속에는 시신들이 내뱉는 추깃

물. 쓰디쓴 파랑. 검은 떫음. 붉은 비린내. 입술 화한

노랑. 다 들었으니 나 이 깊은 구만리장천 연초록 구

멍들 다 씹어 삼키려네. 이것들 뭉개서 온몸에 칠갑

하려네. 내 두 손 두 발 다 묶어놓고 개 밥그릇에 밥

던져주던 사람 앞에서. 내 입으로 내 구멍으로 이

풀밭 이 산천 이 넓은 초록 바다 다 짓이겨버리려네.

온몸에 깜깜한 눈 번쩍 뜨려네. 꽃이 피면 어쩌나.

온몸에 꽃피는 구멍들 가려워 어쩌나. 자장자장 그

꽃 재워줄 손길도 없는데. 세상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몸 열어 새끼를 낳는데. 뜨거운 몸 뒤트는 이 연

초록 벌판 어쩌나.

 

  기도하라하네 쉬지말고기도하라하네 눈물로간청하

라하네 순종하라언제나순종하라그러네 이 세상 구멍

으로 태어났으니 또다시 구멍을 낳으라 그러네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용서를 빌지 않고는 이 세상

넘어 갈 수 없다하네 무릎꿇으라하네 벌레처럼머리를

조아리라하네 두손으로 싹싹빌라하네 낮추고낮추라하

네 무릎을꿇고오줌발을받으라하네 가슴을치며회개하

라하네

 

  열두 마리 새끼 밴 개 한마리처럼 입에 거품을 물

고 네발로 땅 짚고 배를 맨땅에 부비며 새싹들을 뭉

개며 어디로 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봄인지 겨울인

지 비척비척 가려워 아 가려워

 

  하늘만큼 땅만큼 커다래져서 한눈에 보이지도 않

는 여자가 하나 지나가네 뒤뚱뒤뚱 지나가네

 

 

 

 

 

 

 

 

 

 

* 세상에 나올 때부터 좁은 구멍에서 압출진통 겪으며

구멍에 대한 원리를 깨달았네

살면서 구멍이란 구멍은 죄 찾아다니며

숨어있는 그림찾기처럼 월리를 찾았네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죄다 삐져나오고

구멍이란 구멍으로 밀어넣고 또 밀어넣었네

쉬지않고 나오고 또 나오고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구멍은 언제나 또 다른 구멍을 낳았네

낳을 때마다 가렵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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