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일(吉日)[이수익]
보도블록 위에
지렁이 한 마리 꼼짝없이
죽어 있다.
그곳이 닿아야 할 제 생의 마지막 지점이라는 듯.
물기 빠진, 수축된 환절(環節)이 햇빛 속에 드러나
누워 있음이 문득 지워진 어제처럼
편안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흙의 집 떨치고 나와
온 몸을 밀어 여기까지 온 장엄한 고행이
이 길에서 비로소 해탈을 이루었는가,
금빛 왕궁을 버리고 가출했던 그
고타마 싯타르타같이.
몸 주위로 밀려드는 개미떼 조문 행렬 까마득히,
하루가 간다.
* 비가 오면 보도블록위로 지렁이가 기어나오고
달팽이도 떼지어 나온다.
흙에 있는 빗물보다 보도블록 위의 빗물이 별미일까.
천진난만하게 나왔다가 군홧발같은 사람들의 발길질에
툭툭 터져버리고 해탈을 이룬다.
오늘이 길일이야, 몸을 꿈틀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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