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우유 따르는 여자[김정기]

JOOFEM 2010. 5. 1. 08:55

 

 

 

 

 

 

 

우유 따르는 여자[김정기]

 

 

 

 

아직도 여자는 우유를 따르고 있다.

삼백 년도 넘게 우유는 넘치고 넘쳐서

어디로 해서 어느 강으로 몸을 섞었을까.

창문을 통해 들어온 태양은 여자의 왼쪽 팔에서 튀고

짙은 남색 앞치마에 안긴다.

그리고 머릿수건 뒤에 가서 빛으로 조용히 머문다.

허름한 부엌 벽 위에 걸린 바구니 속에 담긴

곡식은 아마 지금쯤 싹이 나서 셀 수 없는 낱알을 만들었겠지

그러나 보았다, 식탁보 밑에 깔린 두꺼운 어두움

알 수 없는 그 나라의 냄새가 풍겨온다.

베르미어*는 신들린 붓으로 고요를 만들고

순하게 네모 반듯한 감옥에 서서

끝없이 우유를 따르고 있다.

그 소리가 지금 나의 잔에도 스민다.

윗저고리의 황홀한 겨자 빛깔이 나부껴온다.

썩지 않는 빵들이 식탁 위에서 계속 발효되고 있다.

 

 

* 베르미어 : 1600년대 네덜란드 화가

 

 

 

 

 

 

* 우유를 따르는 여자의 신성은 썩지 않는 빵처럼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다.

쪼르륵, 쪼르륵 우유를 따르고 크낙한 빵덩어리를 손으로 큼지막히 잘라서 식구수대로 준비하고

셀 수 없는 낱알같은 사랑을 유지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여자에게 준 사명이요, 소명이다.

우유 따르는 일이 멈춰질 때 더이상 인류에게 사랑과 평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우유 따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쪼르륵 배고픈 식구들에게 들려주는 쪼르륵 우유 따르는 소리, 듣기에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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