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가을[정진규]

JOOFEM 2018. 9. 23. 21:23


                                                                                         덕수궁 돌담길






가을[정진규]






풀벌레 울음소리들이 시간을 가을 쪽으로 애써 끌어당
긴다 밤을 지새운다 더듬이가 가을에 바싹 닿아 있다 만
져보면 탱탱하다 팽팽한 줄이다 이슬이 맺혀 있다 풀벌
레들은 제가 가을을 이리로 데려오고 있다고 말하고 싶
을 것이다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풀벌레 울음소리들은 들숨과 날숨의 소리다 날숨은 소
리를 만들고 들숨은 침묵을 만든다 맨 앞쪽의 분명함으
로부터 맨 뒷쪽의 아득함까지 잦아드는 소리의 바다, 그
다음 침묵의 적요를 더 잘 견딘다 짧게 자주자주 소리내
는 귀뚜라미도 침묵이 더 길다 다른 귀뚜라미들이 서로
침묵을 채워주고 있다

열린 온몸을 드나들되 제 몸에 저를 가득 가두어 소리
를 만든다 나는 이 숨가쁜 들숨을 사랑하게 되었다


                                - 本色, 천년의 시작, 2004

 

 








* 호흡가운데 소리냄과 침묵함이 잘 어우러져 한사람의 인격을 만들어 낸다.

소리를 많이 내는 사람은 때로 교만하게 보인다.

그러나 침묵만 하는 사람도 교만해 보인다.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다.

소리냄보다는 침묵으로 지냄이 더 아름다운 계절이다.

사념의 끝에는 높고 파아란 하늘이 있다.

지금 하늘은 내게로 오고 있고 나는 하늘을 사랑하게 된다.

(요즘 하늘 보는 재미, 구름과 눈 맞추는 재미에 산다. 석양이 질 때 더 아름답다.)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게다.

살아있다는 것은 은혜로운 게다.

노래할 땐 노래하게 하고 춤추고 싶을 땐 춤추게 하고 자유를 만끽할 일이다.

문득 시인들이 자주 찾았을 옛서울대 문리대 건너편의 학림다방이 그리워진다.

지금도 삐걱이는 나무계단이 있을까?

혹은 광화문의 인왕다방은?

아니지, 원남동로타리의 시랑에서 신발벗고 마시는 녹차가 더 그리웁다.


인왕다방의 그 누님은 지금쯤 호호백발이 되었을 텐데,

보고싶은 다방마담들......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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