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화석 [김사인]
처마 끝에 비를 걸어 두고
해종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나 듣고 싶다
밀린 일 저만치 밀어놓고, 몇년 동안 미워했던 사람 일도 다 잊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쫓아다니던
밥벌이 강의도 잊고
빗방울 소리를 듣는 건
오래전 애인의 구두 굽이
길바닥에 부딪는 소리를 듣는 일
가난한 골목길을 따라 퉁퉁 부은 다리로 귀가하는 밤길
긴 통화를 하며
길바닥에 부딪는 똑똑똑 소리를
내 방문 노크 소리처럼 받는 일
툇마루에 앉아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헤아리다가
나는 묵은 편지를 마저 읽으리라
빗방울 받아먹는 귀만큼
귀 깊숙이만큼
꼭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또르르 굴러가던 방울이 쏘옥 들어가 박히던
움푹 팬 자리,
그런 자리 하나쯤 만들어놓고
-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 추석 연휴에 여기저기 후다닥 다녀오고 이삿짐을 쌌다.
연휴가 끝나고 이사를 가야 한다.
이사를 갈 때마다 중요한 개인사물은 라면박스에 잘 싸두어야 한다.
그중 편지나 엽서 따위는 잘 싸두는데 싸면서 손에 집히는대로 읽게 된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읽는 엽서에는 '사랑'이 묻어있다.
아, 이만한 사랑을 나에게 주었었구나,하면서 감동하게 된다.
여러 종류의 사랑들이 화석처럼 박힌 편지나 엽서를 읽으며
소중하게 박스에 싸둔다.
먼 훗날 다시 꺼내 읽으면 바스락바스락 사랑이 묻어나올 테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한 그릇의 말 [심재휘] (0) | 2018.10.01 |
---|---|
어느덧나무 [심재휘] (0) | 2018.10.01 |
가을[정진규] (0) | 2018.09.23 |
설거지 [박수서] (0) | 2018.09.17 |
이런 꽃 [오태환] (0) | 2018.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