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나무 [심재휘]
작고 붉은 꽃이 피는 나무가
있었다
어김없이
꽃이 진다고 해도 나무는
제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어김없이 어느덧
흐릿한 뒤를 돌아보는 나무
제가 만든 그늘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느덧나무 어느덧나무
제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러보는 나무들
떠나간 사랑인 듯 가지게 된 저녁이 있었다
출가한 지 오래된 나무여서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은 이름밖에 없었다
-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2018
* 직장을 옮긴지 3개월이 되었다.
전직장으로 택배가 왔대서 영인면 성내리 가는 길에 마을 입구에 서있는
작은 배롱나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년 정도 나의 출근길을 반겨주던 작고 붉은 꽃이 피는 나무였다.
시골 소로길을 따라 드라이브하듯 출퇴근하였던 친구 같은 길에게
내가 떠나간 사랑인 듯하여 미안해 했다.
니가 어느덧나무가 되었구나.
지금 다니는 직장은 좀더 먼 곳이어서 순대(순천향대) 쪽으로 들어가는 길에
작고 붉은 꽃들이 피어있는 커브길을 만나면서 나의 눈이 가는 눈길이 되었다.
앞으로 삼사년 더 다니게 되면 너도 어느덧나무가 되겠다.
지금은 눈길나무라 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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