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따뜻한 한 그릇의 말 [심재휘]

JOOFEM 2018. 10. 1. 13:13








따뜻한 한 그릇의 말 [심재휘]






머리의 부스럼을 긁듯 길 떠난 지 오래된 저녁에

처음인 거리의 식당에 앉아 중얼거린다

껍질이 벗겨진 말들을 뱉는다

목구멍에서 말이 분비되는 증상이 있더니

의사의 처방은 역류성식도염이었다

집을 떠나기 전이었다


식은 죽조차 먹지 못하고 한 달을 누워 있던 아버지

지난겨울 가시기 전에 마지막 장작으로 불 지펴

들릴 듯 말 듯 한 밥 한 그릇을 지어주셨다

늦도록 외롭지 않게 살아라


그때에는 귀에 담지를 못하여 손에 움켜쥐지도 못하여

금세 식어버릴 것 같은 한마디 밥을

서둘러 꿀떡 삼켜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집을 떠나 멀고 혼자인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그 말이

헐어버린 식도에 여태껏 걸려 있는지 중얼거리면

왜 그 말은 껍질도 없이 오래 아플까

아픈 무릎을 만져보는 오늘은 가슴 한가운데가

체한 것처럼 흐리다


                          -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2018












*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자식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준다니

정이 참 많으신 분이다.

유언처럼 주시는 그 말씀은 당신이 보낸 한 평생을 겨우 한 줄로 축약한 거다.

늦도록 외롭지 않게 살아라!

요즘처럼 고독사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이 한 그릇의 밥 같은 말씀이 와닿는 말이다.


과연 나는 훗날 아들에게 딸들에게 무슨 밥 한 그릇을 해 주고 갈라나.

지금부터 정갈하게 쌀 씻는 법부터 배워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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