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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추꽃 [정우연]

부추꽃 부추꽃 [정우연] 봄을 재촉하며 수없이 떨던 보리수와여름을 따라 꽃길이 되어준 채송화백일을 피겠다고 꽃대 곧게 세운 백일홍속살 붉게 태워 가을을 그렸던 맨드라미 당신의 열 평 정원에 하얀 부추꽃 필 때힘겹게 이고 간 주름도 하얗게 피어나고너무도 닮아 곁을 지켰던 꽃들과 함께봄을 그리며 당신도 그리워하리 당신이 꽃으로 피어날 시간붉은 양탄자 깔아 반기고비도 바람도 잠시 숨 돌릴 때곧은 꽃대 지팡이 짚고 편히 오시길 - 대문 없는 집, 달아실, 2025 * 식물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저게 부추꽃이야! 알고 있지?'라고 묻는다.부추 혹은 부추전을 많이 먹어봤지만 꽃은 처음이어서 신기했던 순간이었다.그럼에도 다시 보면 저게 부추꽃인지 알 ..

시와 감상 2025.10.28

시월의 시 [허연]

시월의 시 [허연] 이별하는 것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은 시월을잘 모르는 사람이다. 병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단풍잎. 영혼이 빠져나가 파삭거리기만 하는 풀밭, 초속 오 센티미터*로 떨어지는 마지막 열매들. 죽은 새끼들을 낙엽에 묻고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흙장난하는 아이들 이마에 불어오는 사연 많은 바람. 시월엔 가득 찼던 것들과 뜨거워졌던 것들이 저만치 떠날 짐을 꾸린다. 그걸 알아챈추억들로 남쪽으로 가고. 시월엔 이별이 전부다. 시월은이별밖에 할 줄 모른다. 시월에 무릎을 꿇는 이유다. 세상엔 만남의 몫이 있는 만큼 헤어짐의 몫도 있어서 이토록서늘하다 *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제목. - 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사, 2025 * 한동안 더..

시와 감상 2025.10.20

봄날의 국수 [박시우]

봄날의 국수 [박시우] 식탐 없는 엄마가 하루는국수를 달라고 했다엄마를 돌보던 누님은형제들을 부르고 눈가를 훔치며뜨거운 국수에 울긋불긋한 고명을 얹었다분홍색 턱받이를 두른 엄마는벚꽃 지는 속도로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다더는 떨어질 꽃이 없는 늦은 봄날그게 생애의 마지막 식사가장 쓸쓸한 국수였다 - 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 걷는사람, 2025 * 추석이면 형제자매가 모여 음식을 나눈다.지금은 자리에 없는 엄마 아부지를 생각하며 맛있게도 얌냠한다.그런데 생각나는 것은 생애의 마지막 식사가 떠오른다.그래, 엄마는 이걸 좋아하셨지, 아버지는 저걸 좋아하셨지.하지만 실제로는 마지막 식사가 엉뚱한 것이어서 더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아, 좋아하시던 걸 드시면 좋았을 것을!아마도..

시와 감상 2025.10.09

빵은 괴롭다 [박남희]

빵은 괴롭다 [박남희] 햄이,상추가,소시지가,치즈가,토마토가노크도 없이빵과 빵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다음엔 이빨이 얼쩡거리며 침을 흘린다 어디서 부풀었든 어차피 빵의 위치는 샌드위치 오늘도 빵은 괴롭다 - 시 읽는 일이 봄날의 자랑이 될 때까지, 걷는사람, 2025 * 동네에서 사먹던 빵은 줄서서 먹은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기업화된 큰빵집에 두줄, 세줄 줄을 서서 사먹었다가이젠 아주아주 긴 줄을 서서 한참 뒤에 조별(?)로 입장해서 허겁지겁빵을 사야한다.집게와 쟁반을 들고 이걸 살까 저걸 살까 고민하면 안된다.뒤에 줄 선 사람들을 위해 오분만에 조별 퇴장을 해야한다.빵도 무척이나 괴롭겠지만 빵사는 사람은 더 괴롭다.

시와 감상 2025.10.08

세 번째로, 같은 길을 지나쳤다 [김광명]

세 번째로, 같은 길을 지나쳤다 [김광명] 나는 도착지를 과거에 두고 다니는 사람이다 어떤 걸 가질래? 프랑스식 발음으로, 3초 동안 뜨겁고 30분 동안 식어버리는 땀의 서쪽 나는 이정표 사이로 헤엄치는 방법을 안다 건물을 동공속에 넣고 뭉그러뜨리는 수식도 길은 하나의 이미지다 샐러드처럼 알록달록하다 나는 서있다 서 있으면서 움직인다 흩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라서 오늘은 완벽해, 선언문을 들고 나서면 항상 처음 가는 길 누나 동생 이모 아버지 형과 내가 사는 동네 지도를 끌어당기면 딱 그만큼 어색해지거나 울고 싶어진다 매일 주저 앉기 좋은 길 아빠가 가르쳐 주는 길은 틀린 것같고 어딘지도 모르고 자꾸 가면서 방향을 풀어 놓는다 헤매는 것에도 영사 기능이 있다 서치라이..

시와 감상 202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