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 [임지은]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얘기가 있다
궁금해서 걸어 보았다
덕수궁에 왔다가 입장료 있으니 들어가지는 말자는 사람과
실은 가고 싶은 곳이 창덕궁이었다고 하는 사람과
그걸 왜 인제 와서 말하냐는 사람
길게 이어진 돌담길을 걸었다
여긴 정말 걷기 좋고 돌들도 이렇게 예쁜데
오래된 성당 건물도 보이고
자판에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파는데
헤어지기 좋아서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사실 덕수궁인지 창덕궁인지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네가 더 이상 좋은 사람이 아니고
모자의 시원함과 팔짱의 따뜻함을
좋아하던 우리가 더는 걷고 싶은 계절이 없고
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 돌담길을 걸었다
하나로 시작해 둘로 끝나는 이야기도 좋지만
둘로 시작해서 하나로 끝나는 이야기도
나쁘지 않지 않으니까
덕수궁이 보이니까 들어가 보자는 사람과
꼭 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고 말하는 사람과
그걸 이제라도 알게 되어 기쁘다는 사람이
차례로 내 곁을 지나갔다
-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민음사, 2024
* 일천구백팔십년대의 이야기이다.
헤어질 때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라.
말하기 어렵고 그럴 땐 춘천의 이디오피아 카페를 가라.
그땐 맞았고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헤어지고 싶을 땐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
아무데서나 아무때나 쉽게 말하고 헤어질 것이니
길게 이어진 돌담길이 필요 없어졌다.
지금은 그저 연인들이 지나가고 들리는 곳이 되었다.
덕수궁안에는 수백년 전에 피고지던 식물들이 아직도 번성하고 있다.
이름 없는 식물도 많지만 그만큼 만나고 헤어지던 꽃들의 영혼들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지금도 번성하고 있으니
찬찬히 덕수궁 안을 돌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해 보는 것도 좋을 게다.
이름 없는 꽃들의 사연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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