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학교 [김종삼]
공고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 내에 쌓인 두꺼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 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 김종삼을 생각하다, 예서, 2021
김관식 [김진경]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나는 그의 시를 변변히 읽은 것도 없어
하지만 그는 엄연히
내 시의 가장 큰 스승이야
내 젊은 시절
그와 강경상고 동창이라는 큰 형은
나를 만류해보려고
늘 그를 들먹거리곤 했지
보릿고개를 넘는 시골에 시를 씁네 하고
하얀 양복에 백구두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미친놈이라더군
만석꾼의 자식이었던 그는
그 많은 재산 다 털어먹고
막걸리 주전자를 원망하며 두드리다
서울의 어느 빈민가에서 죽었다더군
그는 그렇게 내 시의 가장 큰 스승이 됐어
말하자면 멸망의 스승인 셈이지
누구나 멸망을 싫어하는 요즘 같은 땐
가끔 그를 떠올려
시가 멸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 수 있는 거지?
- 슬픔의 힘, 문학동네, 2000
관식이처럼 마주 앉아서 [박신규]
미당(未堂)의 아리따운 처제는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협박범 김관식과 결혼했다지
술독에 빠진 남편을 찾아헤맬 때 그녀는
관식아! 관식아! 판자촌 떠나가라 외쳤다지
마치 저녁밥 차려놓고 부르는 애 이름처럽
기억나는가, 달빛 환할수록 더 가난한 골목들
가진 것 없는 우리도 탕진하자
취생몽사 관식이처럼 몰락해버리자
맞짱 뜨려면 이 정부 아니면 장면(張勉) 급은 상대해야지
그렇게 싸우자 관식이처럼 망해버리자
취해서만 호기롭던 청춘이 허기질 때마다
그도 함께 마셔주었지
수십년 전에 요절한 젊음이 마치
오래된 술친구처럼 마주 앉아서
출판사 직원이 되어 편집용 시집을 뒤적이는데
갈피 사이에서 툭 떨어지는 흰 봉투
남태령 산동네에서 발신한 편지가 와 있었다
이십년 전 사월 어느날 너와 나의 숙취를 동봉해서
"귀사에서 펴낸『다시 광야에』(증보판)에도 누락된
김관식 시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전문을 보내드립니다"
정지신호를 무시한 죽음이 너를 앞세우고
십년이 흐르고 또 누군가 곁을 떠난 뒤에도
여린 마음과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혈서 쓴 지문(指紋) 필름 돌고 돌아 세월은 가고
똥으로 오줌으로 위조(僞造)된 역사(歷史)는 굴러내리고'*
그 역사가 또다시 조작되고 미화되는 지금도
이 똥밭 이승의 한 갈피에 살아 있었다
산동네가 전원마을 부촌으로 바뀌고
갓난쟁이 너의 딸들이 입학하고 졸업하고
짝을 만나 아이를 낳는 그 순간에도
내가 죽고 또 천지와 꽃들이 폭삭 망하는 날에도
도움이 될까 하는, 너의 마음만은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중얼중얼 나는 마신다
배꽃 피면서 벚꽃 무너지는 자리에
주저앉자던 약속은 또 기억하는가
소심하고 걱정 많은 눈망울로 남은 벗이여
자꾸 없는 듯 희미하게 있지만 말고
관식이처럼 마주 앉아 딱 한잔만 받아주거라
서른몇살 '피투성이 낙화(落花)'*로 갔을지라도
흔들리는 이 봄날의 꽃잎처럼 잠시만
제발 잠시만 앉았다가 가거라
* 김관식「'완전범죄형의 범죄' 앞에서」(『`66 연간한국시집』,휘문출판사1966) 변형 인용.
-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창비, 2017
김관식의 입관(入棺)[천상병]
심통(心痛)한 바람과 구름이었을 게다, 네 길잡이는
고단한 이 땅에 슬슬 와서는
한다는 일이 가슴에서는 숱한 구슬
입에서는 독한 먼지
터지게 토(吐)해 놓고,
오늘은 별일없다는 듯이
싸구려 관(棺)속에
삼베옷 걸치고
또 슬슬 들어간다.
우리가 두려웠던 것은
네 구슬이 아니라
독한 먼지였다.
좌충우돌의 미학은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드디어 끝난다.
구슬도 먼지도 못되는
점잖은 친구들아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되려 기뻐해다오.
김관식(金冠植)의 가을바람 이는 이 입관(入棺)을
-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답게, 1991
방문 [우대식]
마지막 낡은 옷을 볼모 잡혀가지고
신세진 親舊의 빚을 갚아주마
―김관식,「지구 최후의 날에』
눈이 내리는 날 친구가 온다
눈은 친구의 그림자에 내린다
큰 창문을 열면
막거리 잔으로 녹아드는 눈
눈은 친구 심장 부근
차가운 선로(線路) 위에 내린다
살얼음 낀 동치미 국물을 뜨는
친구의 손이 떨린다
수평을 놓친 맑은 국물이
수저에서 흘러내려 상 위로
떨어지는 정월 보름 즈음
내리는 눈 속에 언뜻
달무리가 보이는 듯도 했다
- 설산 국경, 문예중앙, 2013
강경에서 만난 웃음 [김정석]
강경 젓갈 시장, 어리굴젓을 팔던 여자
젓갈통들 나란히 좁은 사이를 지나다
엉덩이가 서로 닿아 둘 다 웃었는데
그 겸연쩍은 웃음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웃음도 충청도에서 태어나면
느리게 물무늬처럼 퍼지나 봅니다
한 웃음이 끝나고
그 웃음의 끝을 지우기도 전에
새 웃음이 태어나는 얼굴
어리굴젓, 명란젓, 새우젓처럼
오래 묵혀도 상하지 않는 삼투압 웃음
그냥 하는 인사에도 젓갈처럼 정이 감겨와서
이 맛 저 맛 볼 것도 없이
웃음맛 하나만으로 젓갈 두 통 사들고 왔답니다
어쩌고 저쩌고 수작을 할 처녀 총각도 아니지만
오는 길 내내 마음이 설레설레 일어서기도 하고
품고 온 웃음이며 말들이 삭아가는지
내 몸에서도
강바람에 곰삭은 젓갈 냄새가 났습니다
또 오라는 인사는 못 듣고 왔어도
강경에 가면 아무래도 젓갈부터 사러갈 것 같습니다
- 별빛 체인점, 두엄, 2013
* 금강 하구에서 젓갈을 실은 배가 올라와 웅포에 들러 젓갈을 부리고
더 타고 올라오면 강경이라는 큰 포구가 있어 나머지 젓갈을 부린다.
강경 입구에는 백년이 넘는 강경상고가 있고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상고를 나와 젓갈장사를 했을 것이다.
강경상고 교정에 들어서면 시인 김관식의 시비가 서있다.
강경 읍내쯤에는 백반집이 많은데 정식에는 젓갈이 삼십가지는 나온다.
조금씩 맛본다 해도 밥 한 공기로는 모자랄 터.
해마다 젓갈 축제를 하는데 짭잘한 게 먹고 싶으면 가볼만 하다.
강의 풍경이 예뻐서 강경이라고 이름 지었을 게다.(주페가 쓴 글)
삼례 오거리 [허림]
전주에서 비빔밥을 먹고
주인이 맛보라고 권하는 모주도 한 잔하고
달착지근한 겨울 햇살 따라 길을 간다
어디가 어딘지 달리다보니 삼례
길이 많다
길옆 국밥집에 들려 손으로 빚는다는
순대를 달라하고 길을 여쭈니
이리 가면 이리고
저리 가면 전주고
고리 가면 고창이고
그리 가면 금산
여리 가면 여산인디유 얼루 가시는 지유
한자리 비면 저 샥시 강겡에 떨궈주고 가셔유
막차 발세 가버렸다고 저코롬 울상인데
달도 뜨면 긴긴 밤 훤히 가고 남겠시라우
-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지혜, 2013
* 길은 삼거리, 사거리, 오거리 등이 있다.
이짝, 저짝, 그짝, 고짝, 여짝......
여짝은 여산이고 충남과 가까워서 이랬시유, 저랬시유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쓰나보다.
강겡도 강경을 말하는 것이니 충청도에 속한다.
강경은 금강을 따라 뱃길이 열려있어 젓갈로 유명하다.
서울로 치면 마포에 해당된다.
강경엔 백년이 훌쩍 넘은 강경상고가 있고 강경상고가 낳은 시인 김관식이 있다.
젓갈 팔라고 주산을 가르치고 전국에 젓갈을 팔았을 테다.
강경에서 논산을 지나고 계룡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대전이 나온다.
대전에는 특이한 거리가 있다.
바로 네거리다. 보통은 사거리라고 하는데 대전은 네거리라고 한다.
대전사람한테 물어도 잘 모른다. 왜 네거리인지.
아마도 죽을 사,자가 들어가서 네거리라고 하는 게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문득 부산에서는 1번 출구에서 만나면 되는데 1번 입구에서 만나자고 하는 게 생각난다.(주페가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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