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을 찾아서

시 속의 시인, '박용래'

JOOFEM 2024. 9. 7. 09:31

 

 

 

 

 

섬망* [육근상]

 

 

 

 

  난닝구 바람으로 쉬고 계시는 김수영 선생님 찾아뵙고 닭모이라도 한 주먹 집어주고 와야 하고, 막걸리 한 사발로 연명하시는 천상병 선생님 업고 동학사 벚꽃 놀이도 다녀와야 하고, 새벽부터 울고 계시는 박용래 선생님 달래어 강경장 젓맛도 보러가야 하고, 대흥동 두루치기 골목 건축 설계사무소 내신 이상 선생님 개업식도 가봐야 하고, 빽바지에 마도로스파이프 물고 항구 서성이는 박인환 선생님이랑 홍도에도 가봐야 하고, 울음 터뜨린 어린애 삼킨 용당포 수심 재러 들어갔다 아직 나오지 않는 김종삼 선생님 신발도 갔다 드려야 하고, 내 사랑 자야 손 잡고 마가리로 들어가 응앙응앙 소식 없는 백석 선생님께 영어사전도 사다드려야 하고, 선운사 앞 선술집 주모가 부르는 육자배기 가락에 침 흘리고 계시는 서정주 선생님 모시고 대동아전쟁터에도 다녀와야 하는데 봄비는 내 발목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구나

 

 

* 섬망(譫妄) : 의식이 또렷하지 못해 헛소리를 하는 증상

 

 

 

 

애월, 독한년 [박제영]



 


아비 없이 태어난 명자는 열여덟 살 꽃 같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간장을 먹고 절벽을 구르고 약도 먹고 별의별짓을 다했는데 죽지도 않더라 독한년, 독한년, 술에 취한 날이면 어미는 독한년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식구들 모두 빨갱이로 몰려 죽고 혼자 남은 어미가 어찌 살았는지 아니까 어미도 스스로 징한년이 되어 살아남은 것을 너무 잘 아니까 원망은 없다 했습니다

 


먼 남쪽 바다, 涯月의 석양이 왜 핏빛이 되었는지 알려주었던, 박용래와 이용악과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사랑했던, 애월의 모래밭에서 조르바와 춤을 추길 좋아했던, 마침내 애월에 몸을 던져버린 독한년, 열여덟 살 명자는 이제 가고 없습니다

 


먼 훗날 어느 가을 호젓한 오솔길을 홀로 걸을 때 혹여 코스모스 피었거든, 그 붉은 잎에 박용래의 코스모스 한 구절 적어 바람에 날려 보내주면 그것으로 좋겠다던, 독한년 명자, 삼십 년 전 명자가 문득 붉어지는 가을이 있습니다

 

 

                 - 다층, 2017년 봄호

 

 

 

 

정기구독 목록 [최갑수]

 

 

 



나의 정기구독 목록에는
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
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
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
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
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
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
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
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
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
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
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
저공 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
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깨어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들어버린
제라늄 화분 저물 무렵 혼자서 끓여 먹는
삼양라면 다시 필까, 물을 줘보기도 하지만
소식이 없는 제라늄 화분 시들었구나,
식은 밥을 말다 말고 나는


이렇듯 내 가난한 정기구독 목록에는
가난하고도 외로운 이름 몇 개와
붉은 줄이 그어진
희망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연체된 고지서의 커다란 글자들

 

 

 

 

부여에서 시집 읽기 [박주택]

 

 

 

 

이층 까페에 앉아 시집을 읽는다
주인은 주방의 그릇들을 정리하고
창밖은 봄날,
그녀가 김을 부스러 먹는다
그녀는 말이 없다, 등을 벽에 기대고
꽃잎이 술잔 위에 떠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만지고 있다.
밤구름 가는 저쪽, 강이 흐르고
나는 말없는 그녀 앞에서 박용래 시집을
읽는다. 여관의 불빛이 굴절되어
시집이 푸르게 비친다.
나는 그녀처럼 얇은 꽃잎을 만진다
누룩에서 피어나는 꽃잎
바람이 불어 김이, 펄럭 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우리는, 바람이 시키는 대로 여기까지 왔다.
그녀가 시집 위로 손을 얹고 나를 바라본다.
그녀가 땀 흘리는 것을 본다.
시간의 목을 꺾어
그녀가 말없이 눈물을 뻗어 내 얼굴을 감쌌다

 

 

 

 

월훈月暈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 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먼 바다, 창비, 1984

 

 

 

 

박용래 시인의 ‘강아지풀’을 기억하시나요? “다 두고 이슬단지만 들고간다 (…)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로 끝나는 애잔하고 슬픈 시. 산책 중에 강아지풀을 보게 되면 “오요요”라고 말해 보게 됩니다. ‘강아지풀’과 함께 제가 사랑한 시입니다. ‘월훈’은 달무리라는 뜻이지만, 뜻을 몰랐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한겨울 외딴 마을 고독한 노인의 저녁 즈음. 시인이 펼쳐놓는 단어들을 구절구절 귀 기울여 따라가다 보면, 말이 가진 아름다움이란 게 풍경을 고독히 오래 들여다본 이의 세심한 필사에 다름 아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풍경을 낭비하며 사는가, 생각하게도 됩니다.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다고 할 때 ‘여기’는 어디일까요. 거기는 아마도 시인의 마음 속. 오랜 옛날이야기가 살아있는 따뜻하고 고독한 마음 저 깊은 곳의 마을. 2연과 3연을 거듭 읽어봅니다. 적절한 쉼표와 반복이 만드는 가없는 음악. 직설로 말하면 ‘독거노인’의 처량이 되겠으나, 시어의 가없는 음악 속에 독거하는 노인은 존재의 고독이 가진 어떤 품위랄지, 신비랄지 하는 것을 불러일으킵니다. 애잔하고 따스한 이런 환상성이 때로 저를 위로합니다. 오요요― 위로합니다. /  김선우 시인

 

 

 

 

갱(坑) 속 같은 마을의 외딴집 노르스름하게 익은 '모과(木瓜) 빛' 창문 안에서는 노인이 혼자 '기인 밤'을 견뎌내고 있다. 밤중에 홀로 깨어나 무나 고구마를 깎는 노인의 기침 소리와 겨울 귀뚜라미 소리는 사멸을 향한 이중창이다.

 

'모과 빛' 창문에 짚오라기의 설렘과 이름 모를 새들의 온기가 따뜻하게 어룽거리고, '월훈(달무리)'이 지고 함박눈이 들이친다. 서울로, 서울로, 향했던 우리 농촌의 뒷모습이고 매일을, 매일을, 정신없이 달려왔던 우리 노년의 풍경이다.

 

독거·기다림·기침 소리의 '늙음 3종 세트'에 더해진, 월훈·함박눈·귀뚜라미 소리의 '겨울밤 3종 세트'가 깊고 그윽하다. 1970년대 유행했던 영사운드의 '달무리'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적막한 밤하늘에 빛나던 달이~. / 정끝별 시인ㆍ이화여대 교수

 

 

 

 

연민의 시인 박용래의 시편입니다. 월훈의 우리말은 달무리.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 모과빛 등불, 창호지 문살….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이지요. 시 속의 풍경은 달무리가 어리는 시공간. 세상 모든 만물에 “귀를 모으고 듣”는 이가 여기 있습니다. 하물며 인간의 역사를 다 듣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마음이 필요할까요.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인생이란 없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숨을 죽이고 생각하”는 일. 또는 마음의 가장 안쪽까지를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일. 새해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가만히, 저만치 들려오는 새로운 소식에 귀와 마음을 기울이는 나날.

/ 이은규 시인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은 지문처럼 찍어놓은 마음의 등고선을 따라가야만 나오는 마을이다. 마음이 산과 계곡을 이룬 령에 침 넘어가듯 꼴깍, 해가 지면 그 해를 받아 집집이 불을 켜는 마을. 이슥토록 켜진 모과빛 등불도 따듯하고, 처마깃을 파고든 새들의 겨울나기를 걱정하는 노인의 마음도 따듯하다. 새들이 놀래 달아나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 귀를 모으는 노인처럼 나직나직 함박눈이 내리고 달그림자가 진다. 여기서 아무도 찾지 않는 산골의 고독은 찾아가야 할 아늑한 어떤 풍경으로 바뀐다. 참된 고독은 짚오라기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을 통해서도 나를 둘러싼 세계와 설레이며 교감할 줄 아는 것. 그런데, 동거해온 귀뚜라미만 유난스레 울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벽이 무너져라 떼를 지어 통곡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래도 마음의 지도를 밝혀주던 불이 한 등 까무룩 꺼져버렸나 보다. 아는지 모르는지 기침 소리도 나지 않는 지붕 위로 무심한 함박눈만 쌓인다.

/ 손택수 시인

 

 

 

 

박용래의 시에 나타나 있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정서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관념적인 것이다. 이 시의 배경도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도 다분히 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의 세계가 시인의 애상적 정서와 결합하면서 또 그것을 향토적 서정으로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도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기엔 있다는 서두부터 독자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동화 속의 세계가 아니라,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우리의 옛 고향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어서 전혀 낯설지 않다. 허방다리를 들어내면 보이는 조그맣고 갱 속 같이 파묻힌 마을, 그 곳에서도 시인의 시선은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한 삶에 집중된다.

 

외딴집에 홀로 사는 노인은 깊은 밤에 잠이 깨어 무나 고구마를 깎지만, 실제로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바람 소리에 귀를 귀울리는 데 신경을 모은다. 이러한 정서는 마치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 진다'는 시조의 그것과 적절히 부합되는 것이다. 노인의 청각은 짚단과 짚오라기의 서걱거림에서 처마깃의 이름 모를 새의 자그마한 움직임에까지 이어지지만 자기를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문득 통곡한다. 이러한 청각의 집중은 노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더욱 증폭시켜 주는 한편, 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알려 주는 징표로 기능한다.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겨울 귀뚜라미가 벽이 무너지라고 우는 것을 노인의 통곡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벽이 무너지라 우는 귀뚜라미를 겨울 귀뚜라미라고 표현한 데서 동료들과 헤어져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의 신세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사는 노인의 처지가 교묘한 일치를 이룬다. 그러니까 '떼를 지어 웁니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실제 떼를 지어 운다는 것이 아니라, 밤이 정적을 뚫고 울리는 귀뚜라미의 소리가 그만큼 크게 들린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참고 참았던 노인의 내면적 고독과 그리움이 단숨에 터져 나온 통곡과도 같은 것이다.

김태형ㆍ정희성 엮음, 『현대 시의 이해와 감상 1ㆍ2』, 문원각, 2003

 

 

 

 

향토적인 생활 정서에 뿌리박고 있는 박용래의 시는 문명의 때[垢]가 묻지 않은 토속 세계를 통하여 삶의 무상함을 정지적(靜止的) 언어로 표현한다. 형식면에서는 주로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비유에 의존하고 있으며, 대상을 형상화시키는 데 그가 즐겨 사용한 방법은 '소묘법'이다. 비록 단조로운 단색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간결하고 날카로운 소묘는 회상물의 대상을 객관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의 많은 시가 정상적인 구문(構文)보다 명사나 명사형 어미로 시행을 끝맺고 있는 것도 그의 소묘적 방법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행간의 여백을 중시하는 것도 바로 그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겨울 산촌의 외딴집에서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자어를 배제한 토속어와 경어체 구문의 사용, 그리고 명사 종결 어구를 삽입하는 등 다양한 표현 방법을 통해 산촌의 적막함과 노인의 고독감의 깊이를 더해 주는 한편, 향토적 정서에 바탕을 둔 비유와 다양한 감각의 이미지, 쉼표와 의태어의 적절한 사용은 이 시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끝 부분에서 나타나는 귀뚜라미로의 감정 이입은 노인의 고독을 심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 형태로, 화자는 원경에서 근경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이 시는 먼저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다는 다소 환상적인 세계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단순히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속 같은 세계가 아니라,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원시적 토속 세계이다. 노인이 살고 있는 그 곳은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조그맣고 갱 속같이 파묻힌 마을로, 노루꼬리만큼 짧은 겨울해가 저물면 각 집들은 봉당에 불을 매단다. 그런 마을의 한구석에 위치한 노인의 '외딴집' 창문에 이슥토록 켜진 불빛은 마치 잘 익은 '모과빛' 같이 싱그럽기만 하다.

 

깊어가는 겨울밤, 노인은 문득 잠에서 깨어나 시장기를 느끼고는 무나 고구마를 깎으며 행여 누군가 찾아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다림으로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노인은 짚단과 짚오라기의 서걱거림에서부터 처마깃의 이름 모를 새의 작은 날개짓에 이르기까지 청각을 집중해 보지만, 자기를 찾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 외로움에 절망해 버린다. 노인의 이러한 행위는 그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증폭시켜 주는 동시에, 시인이 가지고 있는 섬세한 감각을 드러내는 징표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한동안 계속되던 노인의 밭은 기침 소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벽 속에서는 겨울 귀뚜라미가 떼를 지어 벽이 무너지라고 울어 댄다. 여기서 '겨울 귀뚜라미'는 동료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를 일컫는 것이며, 떼를 지어 벽이 무너지라고 우는 것은 겨울밤의 고요를 깨는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가 그만큼 크게 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고 있는 노인의 처지가 교묘히 일치하게 됨으로써 결국은 귀뚜라미는 노인의 감정이 이입된 사물임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서럽게 울어 대는 귀뚜라미처럼 노인도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고독감과 함께 산촌의 적막함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때, 문밖에선 가는 눈발이 치는지 또는 함박눈이 한바탕 뿌려주는지, 어디선가 희끄무레한 달무리가 떠오르는 풍경을 제시하면서 시상을 끝맺고 있다.

양승준ㆍ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1ㆍ2』, 태학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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