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세 번째로, 같은 길을 지나쳤다 [김광명]

JOOFEM 2025. 10. 4. 09:18

 

 

 

 

 

세 번째로, 같은 길을 지나쳤다 [김광명]

 

 

 

 

  나는 도착지를 과거에 두고 다니는 사람이다

 

  어떤 걸 가질래? 프랑스식 발음으로, 3초 동안 뜨겁고 30

분 동안 식어버리는 땀의 서쪽

 

  나는 이정표 사이로 헤엄치는 방법을 안다 건물을 동공

속에 넣고 뭉그러뜨리는 수식도

  길은 하나의 이미지다 샐러드처럼 알록달록하다 나는 서

있다 서 있으면서 움직인다 흩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라서

 

  오늘은 완벽해, 선언문을 들고 나서면 항상 처음 가는 길

  누나 동생 이모 아버지 형과 내가 사는 동네

  지도를 끌어당기면 딱 그만큼 어색해지거나 울고 싶어진

다 매일 주저 앉기 좋은 길 아빠가 가르쳐 주는 길은 틀린 것

같고

 

  어딘지도 모르고 자꾸 가면서 방향을 풀어 놓는다

 

  헤매는 것에도 영사 기능이 있다 서치라이트를 따라 걷는

원형 방황이다 출발점은 도착점이다 보풀을 일으키는 기억

이 건물을 바꾼다 분명 왔던 곳인데 새로운 곳

  내게는 거울에 비친 달력을 추상화로 보는 능력이 있지만

 

  3시 방향에선 시계만 독딱거린다 머릿속을 유괴해 바깥에

꺼내 놓는다

  보이지 않는 길을 잡아당기면 부에노스아이레스공항 교

회 기차역 스케이트장 오락실까지 따라 나온다 찾아가는 일

은 되지 않는 일을 되게 하는 기적이다

 

  왠지 예감이 좋으면, 모르는 길이다

  다 온 것 같은데

  지상에 온 사람들은 저마다 제 앞으로 오줌을 갈기며 산다

 

  모든 퇴근은 막다른 골목, 나는 낮에 갔던 곳을 밤에는 찾

아가지 못한다

  누가 어떤 이유로

  구두들을 데려왔는지 왼발, 춤을 추며 왼발

 

  다리는 움직이기 위해 태어난다

  뒤축 사라진 피아졸라 풍으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

 

 

                - 난 늘 첫사랑만 해요, 시인의 일요일, 2025

 

 

 

 

 

 

* 어디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랫동네였을 것이다.

숲길을 미로로 만들어 뺑글뺑글 돌다가 간신히 어찌어찌해서 빠져나왔던 미로.

다시 들어가십니까?

누가 질문한다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했을 게다.

미로에 갇혔을 때도 나갈 수 있을까? 불안했고

멀고 먼 길을 걸어갈 때도 끝이 있을까 막막하고 두려웠던 기분이 늘 함께 했다.

군대에선 시도 때도 없이 백킬로 행군을 했는데

발을 고생시키고 두려운 기분이 끝까지 함께 해서 미로찾기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가끔 티비에선 산티아고길을 걷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마치고 펑펑 우는 사람도 많이 보았건만  '저걸 뭐라고 걸을까 싶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돌이켜보면 참 멀리도 왔구나 싶으면서도 

아, 얼마 안남았을 거야! 힘내보자.

발이 강수진의 발처럼 엉망진창이 된다해도 춤을 추듯 미로를 걷고 또 걷고 하다보면

발이 편안해지는 날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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