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이재무]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녀의 울음은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나는 그녀처럼 헤픈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 몸속엔
그렇고 그런 싸구려 내용들이
진설되어 있다 그녀의 몸엔
아주 익숙한 내음이 배어 있다 그녀는
24시간 노동을 쉰 적이 없다 사시사철
그렁그렁 가래를 끓는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들처럼 흔한 것도 없으니
한밤중 늙고 지친 한 여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울음에 주목하지 않는다
살진 소파에 앉아 자정 너머의 TV를
노려보던 한 사내가 일어나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 몸속에 두꺼운 손을 집어넣는다
함부로 이곳저곳을 더듬고 주물러댄다
* 사랑은 냉장고문을 여는 것과 같은 것.
하지만 누구라도 원하면 여는 것은 아닌 것.
오직 한 사내만이 충혈된 눈으로 이곳저곳을 주물러댈 수 있는 것.
사랑은 그렇게 열고 닫고
사랑은 그렇게 꺼내고 집어넣고
사랑은 그렇게 헤픈듯 함부로 하는 것.
사랑은 그렇게 몸으로 익숙해져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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