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사평역에서[곽재구]

JOOFEM 2007. 3. 1. 23:33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버려진 사람은 버려진 그 순간을 기억하며 필사적으로 그 기억을 움켜쥐고 산다.
  내 다시 버린 사람을 만난다면 꼭 꼭 물어보리라.
  왜 나를 버리셨나요.
  왜 나를 찾지 않으셨나요.
  원망과 분노의 마음이 내면 깊숙히 꼬깃꼬깃 접혀져 있고
  만나면 펴리라, 만나면 펴리라.
  긴긴 세월을 한줌 톱밥 태우듯 주먹 꼭 쥔 채 살았을 게다.
 
 
  어제 미국에 입양되었다가 스키선수가 된 D가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났다.
  디엔에이도 일치하고 모습도 비슷하다.
  왜 찾지 않으셨나요, 던진 질문은 한줌 톱밥 태워지듯 태워지고
  생물학적 존재가 명백히 밝혀졌다.
  다시 만남은 행복할까,
 
 
  이미 함께 탔어야할 기차는 떠나가고
  각기 상행선과 하행선으로 나뉘어
  D야, 아버지, 서로 부르며 헤어져야 할 테다.
 
 
  끝내 D의 손을 놓았던 운명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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