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도장골 시편 - 민달팽이[김신용]

JOOFEM 2007. 4. 20. 19:27

 

 

 

 

 

 

 

도장골 시편 - 민달팽이[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감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納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 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 3년전에는 단독주택에 살았댔다. 마당에는 이것저것 화초가 심어졌고 토끼가 세마리 마당에서 놀고 칸쵸도 놀고 닭도 놀고 기러기도 놀고 각종 잡초와 대추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살았댔다. 물웅덩이에는 모기쉐끼들도 살았고 그놈 쉐끼들 먹으라고 미꾸라지도 살았댔다. 골드메린지 메리골든지 꽃도 많이 갖다 심고 고추며 토마토며 호박이며 심었댔다. 그런데, 그런데 아주 얄미운 놈이 두 종류가 있었다. 한 종류는 도둑 고양이로 토끼를 두마리 물어 죽였고 칸쵸와 싸워서 상처를 남겼다. 또 한 종류는 민달팽이인데 이 놈은 골드메리를 초토화시켜서 꽃이 피기 전에 똑똑 끊어 먹었다. 달팽이는 귀여우나 민달팽이는 아조 밉다. 그럼에도 시인 김신용은 시를 쓰다니, 저 용납, 저 관용, 저 사랑. 놀랍지 않은가.

 

치워라, 민달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