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탄 비구니[정호승]
그대 지하철역마다 절 한 채 지으신다
눈물 한 방울에 절 하나 떨구신다
한손엔 바랑
또 한손엔 휴대폰을 꼭 쥐고
자정 가까운 시각
수서행 지하철을 타고 가는 그대 옆에 앉아
나는 그대가 지어놓은 절을 자꾸 허문다
한 채를 지으면 열 채를 허물고
두 채를 지으면 백 채를 허문다
차창 밖은 어둠이다
어둠 속에 무안 백련지가 지나간다
승객들이 순간순간 백련처럼 피었다 사라진다
열차가 출발할 때마다 들리는
저 풍경소리를 들으며
나는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다니는 사내처럼 운다
사람 사는 일
누구나 마음속에 절 하나 짓는 일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마는일
* 그냥 비구니가 지하철을 탔을 뿐인데
나는 그 옆에 앉아 절을 지었다 허물었다 별짓을 다 한다.
비구니가 내게 말을 건 것도 아니고
관심조차 준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누구나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통해
내 몸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고
상상이 달라진다.
때로 예쁜 여자를 만나면 종족보존의 본능에 충실해 결혼을 꿈꾼다.
다음 역에서 여자가 내리고 나서야 꿈은 허물어지고
책 읽는 남자를 바라보며 중후하고 멋있는 노후를 꿈꾼다.
다음 역에서 남자가 내리고 나서야 또 꿈은 허물어지고
싹 다 허물어진 성 위에 또 하나의 성을 세운다.
그냥 아무 인연도 없는 이가 내 옆에 있을 뿐인데,
부질없는 상상이 나를 달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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