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들깻단[정진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슬프게 좋으냐 눈물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네,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 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 오늘같이 추운 날은 일천구백팔십오년의 겨울이 생각난다.
추운 겨울 훈련을 나가면 한데서 잠을 자야 한다.
비료포대를 주워서 덮고 자면 그게 그렇게 따뜻하다.
안 덮을 때에 비해 따뜻하다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군화는 버석거리고 온 몸은 굳어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럴 땐 도덕이 필요없다.
부하 사병들이 마른 들깻단을 훔쳐와도 야단칠 힘이 없다.
입이 얼어붙은 까닭이다.
불 붙이면 활활 타오르며 한 순간에 몸을 녹여준다.
- 어떤 베라먹을 자식들이 들깻단을 가져갔어. XXX들.
욕 먹어도 싸다. 그래도 그 훈기는 모든 걸 용서한다. 미안해요,미안해요......괜찮다,괜찮다......
금방 다 태우고 나면 남은 잿더미속에서 늙은 아버지의 욕설이 아직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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