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활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너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김왕노]
너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르고 떠난 후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누군가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가를 알지만
자작나무니 풀꽃으로 부르기 위해
제 영혼의 입술을 가다듬고
셀 수 없이 익혔을 아름다운 발성법
누구나 애절하게 한 사람을 그 무엇이라 부르고 싶거나 부르지만
한 사람은 부르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거나
세상 건너편에 서 있다
우리가 서로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무엇이 되어 어둑한 골목에
환한 외등이나 꽃으로 밤새 타오르며 기다리자
새벽이 오는 발소리를 그렇게 기다리자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불러주었듯
너를 별이라 불러주었을 때 캄캄한 자작나무숲 위로
네가 별로 떠올라 휘날리면 나만의 별이라 고집하지 않겠다
너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 내가 당신을 부를 수 있고
당신이 나를 불러 줄 때
비로서 사랑이 시작된다.
비록 블로그의 이름이 아이디에 불과하여도
부를 수 있고 불러 주므로
의미있는 관계가 되며 교감의 시작이 된다.
어줍잖게 시작한 블질이 어느덧 삼만명이 다녀가고
함께 시를 사랑했다.
삼십년 넘게 혹은 사흘 남짓이라도
나를 주페라 불렀던 모든 이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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