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對話)[나희덕]
무당벌레와 나밖에 없다
추위를 피해 이 방에 숨어들기는 마찬가지다
방바닥을 하염없이 기어가다가
무료한 듯 몸을 뒤집고 버둥거리다가
펼쳐놓은 책갈피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기억이라도 난 듯
뒤꽁무니에서 날개를 꺼내 위이잉 털기도 한다
작은 전기톱날처럼
마음 어딘가를 베고 가는 날개 소리,
창으로 든 겨울 햇살이 점박이 등을 비추고
그 등을 바라보는 눈가를 비추면
내 속의 자벌레가
네 속의 무당벌레에게 말을 건넨다
조금은 벌레인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는 어떤 것일까
냄새를 피우거나
서로의 주위를 맴돌며 붕붕거리는 것?
함께 뒤집혀 버둥거리는 것?
암술과 수술을 드나들며
꽃가루를 헛되이 일으키는 것?
어느 구석진 창틀에서 말라가기 전까지
조금은 벌레인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온기는 어떤 것일까
노루꼬리처럼 짧은 겨울 햇살 한 줌
* 추위를 피해 들어온 이 방에서 당신과 내가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너무 초라한 말 한 마디씩,
겨울 햇살 한 줌처럼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헛됨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하였으니
자존이란 무엇이고
심연이란 무엇인가
쓸쓸한 연가처럼
'나는 없어.'
'나도 없어.'
부재를 통지하는 마지막 온기
자벌레도 갈 곳 몰라 이리저리 방향만 탐색하며
무당벌레처럼 뒤집혀 버둥거리기만 한다
벌레같은 우리가 나누는 마지막 몸짓의 대화
다 식어터진 커피를 마시는 기분, 그대는 알고 있나
이 방엔 우리밖에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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