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척[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 미치는 봄날은 갔다, 이만한 나이에
더 이상의 화학적 작용은 없을지니
누가 내게 다가와 우뚝 설까만
선들, 슬쩍슬쩍 건드린들
지친 오만년의 세월에 내뱉는 말은 그랬을 거다.
왜 이제 왔어요.
오만개의 밥상이라,
흠, 일년은 삼백육십오일
하루는 세끼의 식사라면
나누기했을 때 대략 마흔여섯의 나이쯤이다.
내 나이에 살겠니,말겠니 물어 온다면
왜 이제 왔어요.
때로는
나도 다른 세상을 꿈꾸나니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이 인기척을 내준다면
폭설이 내리길 기다리고
폭설안에 갇혀 다른 세상을 살리,
숨 못쉬고 먹고 마실 것 없을지라도
폭설안에 갇혀 사는 삶을 감사하며
왜 이제 왔어요,라고 불평 않고
꿈같은 세상도 있군요,라고 말하며
폭설안의 아늑함과 따뜻함을 느껴보리.
사족. 꿈꾸는 걸 가지고 시비걸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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