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이문재]

JOOFEM 2008. 1. 12. 00:30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이문재]

 

 

 

 

 

아빠는 고시원에 계시고

엄마는 아마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찬찬찬,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컵라면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텔레비전이었고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방과 후 학원이었다.

그렇다고 이 할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아빠는 몇 년째 고시원에 계시고

엄마는 몇 년째 노래방에서 울고 싶어라, 탬버린

 

아빠 같은 아저씨와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불편해지지 않았다.

돈을 받지 않는 어린 창녀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엄마 같은 아줌마 핸드백을 뒤지고 나서도

나는 꿈 없는 깊은 잠을 잤다.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서 힘을 얻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훔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워하지 않는 것이다.

컵라면을 다섯 가지 방법으로 요리하는 것이다.

이틀 동안 굶는 것이다.

이 다음에 커서, 테러리스트가 되어

비행기를 납치하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 다음에 커서, 그때까지 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인도를 하나 사서 작은 나라를 만드는

꿈을 꿀 때 나는 힘이 생긴다.

 

아빠랑 싸우고 싶은데 아빠를 만날 수가 없다.

엄마를 두들겨 패주고 싶은데 엄마와 마주칠 시간이 없다.

 

또 늦었다.

얼른 학교에 가야한다. 가서 눈 좀 붙여야 한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집 밖이었다.

그렇다고 어딘가 이 할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 빼앗긴 십년은 경제의 피폐를 가져왔다.

  가장은 무능력한 정부를 닮아 고시원으로 도피행각을 벌이고

  엄마는 눈물젖은 빵을 벌기 위해 몹쓸 짓을 했다.

  당연히 유기된 것은 빈 집의 아이들이다.

  컵라면으로 팔할을 때워도 희망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분노의 상상은 때로 힘이 되어준다.

  긍정과 따뜻함은 세상 어느 구석에도 없다.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부끄러운 걸 모르는 사람이 되어

  조증환자처럼 떠들어댄다.

  누구든 이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다움을 포기한 이 인문학의 위기를

  단 한줄의 경구(警句)로 극복해야 한다,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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