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멍 [김은경]
오래 기다린 사람
기다리는 버스가 오지 않을 때
토큰 구멍 속으로 세상을 들여다 보라
둥근 바퀴 둥근 뒤통수 둥근 햇살 둥근 하늘
새삼스럽게 세상은 둥근 것 투성이다
현명하거나 혹은 어리석은 기다림이라 할지라도
팽팽한 기다림의 끈조차 둥글어질 때까지
찔끔 눈물 한 방울 둥글게 떨어질 때까지
세상을 한번 굴려 보라
그러면
구르지 않는 것들조차 함께 굴리며
길들은 껄껄 웃기도 하는 것이다
삭풍조차 둥글어지는 길들의 저녁, 저녁의 길들
한번도 마중나가 보지 않은 동구 밖을 가듯이
탐조등도 없는 갱도의 둥근 어둠 속을 가듯이
이제 나는 너를 기다려 보기로 한다
비오는 여름날 양철냄비에서 건져낸
삶은감자 냄새 피어오르는 해거름녘
둥근 지붕의 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이 튀어오른다
기다림이 통통 튀어오르고 있다.
계간『실천문학』2000년 여름호
* 수평선다방에서 온 편지,에 담긴 시를 올려 보았다.
작은 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보이고
공처럼 튀어오르는 기다림도 있다.
이 시를 옮기면서 서랍을 열어 토큰을 만져보았다.
내 서랍에 갇혀있는 토큰 한 개. 작은 구멍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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