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률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정끝별]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 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제23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08
* 우리의 기억속에는 분명 존재하는데 사라진 것들이 있다.
가령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라던가, 포도나무 가득했던 과수원이라던가,
어느날 갑자기 톱질이 되어 사라진 후
흔적조차 찾을 순 없어도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있는 흔적.
기억의 척추는 넘어져도 그 기억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늘이 주었던 아늑함은 그 어디서 느껴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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