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가을의 바닥에 우리는 서 있다.
세월이 저 혼자 흘러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한 때 공중에서 영화를 누렸던 적이 있었다.
다 헛된 일인 줄 알기는 하였지만 이제 바닥에서 옛일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바람이 가랑잎을 희롱할 때도
우리는 그게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그게 옛일이 된 지금 나는 바닥에 누워 여기가 바닥임을 비로소 안다.
하늘이 저리도 멀게 느껴진다.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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