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마취[김희업]
흰옷 입은 사내가
달콤한 잠옷을 내게 건네주었어
그걸 채 입기도 전에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어
무아의 경지였어
그렇다고 꿈을 꾸는 건 절대 아니야
어떠한 꿈도 내게는 사치에 불과해
사실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꿈불감증을 앓고 있어
빠르게 도망가는 잠을 놓치지 않겠어
잠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죽음의 국경선에 놓인 잠의 나라에 쉽게 도달할 수 있어
내가 잠을 자든 잠이 나를 재우든 상관없어
가난한 영혼은 나보다 먼저 잠들어 있을 테니
내 몸을 탐하거라 암울한 사자使者여
반납하고 싶어 안달하는
내 것이 아닌 내 몸을 가져가시라
나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새롭게 태어나겠어
마취의 눈꺼풀이 열리자
없어진 머리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왔어
오오 악몽 같은 낡은 세계여
낯선 나는 왜 여기에 버젓이 있는가
곁에 나란히 누웠던
실패한 죽음을 비웃으며
나는 혀를 끌끌 찼어
회복실의 불빛, 내 몸 훑어
차례차례
잠의 옷을 벗기고 있었어
거기 또 다른 내가 있었어
* 최근에 위에 문제가 생겨 수면내시경을 몇번 했다.
수면제를 몸에다 놓아서 비몽사몽간에 내시경검사를 했을 테지만
깨어보면 다른 방에 누워 잠을 잔 나를 발견한다.
- 제가 여기를 어떻게 왔죠
하고 물으면 간호사는 신발 신고 짐 챙기고 걸어서 오셨어요,라고 대답한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정신을 놓은 채 두어시간을 산 셈이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 주사를 놓았다고 하니 더구나 신기하다.
수면제를 몸에 놓아도 이런데 전신을 마취한다면 정말로 또다른 내가 존재할 것만 같다.
혹은 내가 다른 생에서 와서 전신마취 상태에서 지금의 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잠에서 깨어나면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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