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개와 뚜껑[장석주]
병뚜껑을 여는 일은
실은 병의 목을 따는 것이다.
잘 훈련된 刺客들이
병의 목을 따기 위해 내려온다.
순식간이다, 딱, 하는 신음과 동시에
뚜껑이 몸통에서 떨어지고
몸통의 체액과 비밀의 거품을 뿜어낸다.
이 분리의 순간은
無頭人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풀밭에 함부로 뒹구는
저 금속조각들.
저 뚜껑들이 무두인의 두개골이다.
해결사들은 서둘러 돌아간다.
따개와 뚜껑의 세계는
엽낭게의 사생활과는 다를 것이다.
* 따개로 뚜껑을 따는 행위는
투우사가 투우의 정수리에 칼을 꽂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것을 '진실의 순간'이라고 부른다.
살면서 따개로 뚜껑을 열어야 할 순간은 많이 찾아온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그 순간에 따느냐, 못 따느냐는 순전히 내 몫이고
내 결정이다.
진실의 순간은 그래서 늘 준비하지 않으면 비껴가는 운명이 된다.
**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한 친구가 수통의 뚜껑을 잃어버렸다.
구대장에게 분실신고를 하면서
'수통 따꽁을 잃어버렸다,고 보고하였었다.
아마 부산친구였던 것 같은데
그 따꽁이란 사투리가 생각난다.
왠지 따개로 뚜껑을 따면 '따꽁'하고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춘음(新春吟) [박목월] (0) | 2008.12.31 |
---|---|
무릎[정호승] (0) | 2008.12.28 |
크리스마스[여태천] (0) | 2008.12.25 |
소[신달자] (0) | 2008.12.20 |
[스크랩] 서평-김혜원 시집『물고기 시계』 (0) | 2008.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