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소설(小雪)을 지나다 (외 4편) [홍정순]

JOOFEM 2009. 3. 2. 20:06

 

 

 

 

 

 

 

 

소설(小雪)을 지나다 (외 4편) [홍정순]

 

 

 

 



은행잎 지고 겨울비 오는 날
일 피해 사람 피해 찾은 시골집
첫서리 오고, 김장하고 마늘 심은 후
서리태 타작한, 이맘때
바깥 풍경은 나만큼 촌스럽다
누워서도 보기엔 감나무가 최고다
들창에 세 든 지 오래된 모습이라 그렇고,
가지가지 종잘종잘,
새 소리를 달고 있어서 더 그렇다
마늘 심은 밭을 지나는 바람 같은 소리
매점매석 했다 해도
눈감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감나무 그늘에서 자라 감 먹고 살아 온 그 소리는
전대 풀고 나온 나를 창문 앞에 서게 했다
이파리 다 떨군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철물점 연탄난로를 쬐던 거칠고 곱은 손들이 보인다
먹고사는 일에, 온전히 한 해를 다 보낸 발자국소리 들린다
보일러 소리, 냉장고 소리,
창문을 치고 두드리는 계곡 바람 거친데
풍경은 거짓말처럼 소설(小雪) 무렵을 지나고 있다

 

 

 

 

 

 


파리

 

 




탈곡기 벨트에 잘린 손가락을 만나도 울지 않을래
왁스는 천원, 뻑뻑한 탈곡기 벨트엔 왁스를
연탄난로 위 찌그러진 양은주전자는 분주하고
봉다리 커피 종이컵에서 풀릴 때, 양생되는 아침
무수한 연장은 일을 만든다 삶이 연장된다
향미다방 화장실은 아직도 재래식
파리를 본다
문틀 위에 놓인 담배를 본다
코앞에 걸린 휴지를 본다
끈끈이에 휴지된 또 한 생을 본다
파리똥 앉은 파리채를 본다
누구를 위해 빌어 봤음 좋겠다
뒷산 도토리 쏟아질 무렵,
삼거리 곱창집 개업식 무렵,
목숨을 얻고 목숨을 잃고
쭈그리고 앉아서 엉덩이를 옴짝거려야 사는,
뒷다리를 비빈다 날개도 벌어졌다 오므라진다
―대충 살아도 살아진다는데

 

 

 

 

 

 


장갑

 

 




사람이 보인다, 장갑을 보면
그 사람의 손도 보인다
다섯 개의 구멍은 저마다의 굵기와 깊이를 가졌다
현장의 시작과 끝은 그들의 모습으로 알 수 있다
장갑을 뒷주머니에 꽂으면
그게 작업장의 패션이 된다
찾는 장갑을 보면
기초를 하는지 미장을 하는지 도배를 하는지
다 보인다
행사에서 잠깐 둔갑하는 기사님 장갑,
진짜 이름은 예식 장갑이다
반코팅 장갑은 일용의 기본 장갑
인부들이 갖출 기초 장비
낱개로 사면 일이 없는 사람이요
한 타 사면 큰일 하는 사람이다
KT 직원이 목장갑을 사는 이유는 전봇대 때문,
목수 장씨가 용접 장갑을 사는 이유는 패널 때문,
무수촌 이장 이씨가 반도체 장갑을 사는 이유는 접과 때문,

장갑엔 저마다의 이유가 들어 있다
장갑엔 저마다의 일이 들어 있다
저마다의 목소리는 사는 이유가 된다

 

 

 

 

 


사이

 

 

 



소한과 대한 사이
촌사람과 철물점 사이
쫓는 일과 잡는 일 그 사이
눈길과 첫 발자국이 놓인 그 사이
철사 줄과 와야 줄 그 굵기와 길이 사이
가늘고 강한 선 하나, 올무가 되는 그 사이
먼 산 한 바퀴, 올무에 걸려 휘는 그 사이
어머니, 문고리를 잡고 십 남매를 낳는 사이
아버지, 문고리에 걸고 털을 벗기는 사이
동지섣달 환하게 날아오르는 나비
십 남매의 호구지책이었으므로
무수한 연장과 일 사이
담장 아래 장독대와
밑둥치 금간 항아리 사이
쫓는 일과 잡는 일과 먹는 일 사이
추억과 망각 사이
잊혀짐과 버려짐 사이
고를 푼 올무와 문고리 사이
그대 생각

 

 

 

 

 


철물점 여자

 

 

 




예외 없다 사람 손 가야 비로소 제값 하는
무수한 연장들 틈새에서 시 쓰는 여자가 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여덟 시까지
못 팔아야 살지만 못 팔아도 사는 여자
십 년 전 마음에 심은 작심(作心)이라는 볼트 하나
너트로 한 바퀴 더 조여야 하는
사월은 성수기
작업 현장에 연장이 필요하듯
여자에겐 시간이 절실하다
시를 쓰겠다고 한 시간 일찍 나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를
고요 속 새벽이 빨아들인다
뒤란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
흙집을 개조한 철물점 기와지붕엔
아직도 이끼가 끼어 있어
늘 기역자로 만나야 하는 새 소리는
어긋나 포개진 기왓장 틈새에 알 낳고 품었을 그 시간들,
지난 십 년을 생각나게 하는데
용마루 위 일가 이룬 새들의 울음소리에
자꾸만 착해지는 여자
지명 따라 지은 이름 '대강 철물점'
간판 너머엔
적당히 보리밭 흔드는 바람이 불고
멋대로 떨어지는 감꽃도 싱싱하지만
개줄 하나 팔고 앉으면 받침 하나 빠지고
물통 하나 팔고 앉으면 단어 하나 달아난다
오늘도
철물처럼 무거운 시
플라스틱 약수통처럼 가볍고 싶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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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순 / 1972년생. 주소 : 충북 단양군 대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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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2009년 봄호

 

 

 

 

 

 

 

 

* 오늘 시안 신인상을 수상했다고 한국일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아카바님 혹은 ch-초님 혹은 홍정수님.

진짜이름, 홍정순님이다.

시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지금 당장 대강철물점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연탄난로, 양은 주전자, 향미다방, 반도체장갑, 철사줄과 와야줄, 볼트와 너트, 플라스틱 약수통.......

아카바님의 손때묻은 것들은 죄다 시에 등장했다.

그야말로 철물의 영광이다. 더불어 향미다방의 영광이다.

처녀불알과 고양이뿔 빼고는 없는 게 없는 대강철물점이다.

이제부터  철물점 식구들이 하나씩 하나씩 시에 등장할 것이다.

향미다방 마담이나 수석가게 사장님이나 팡팡노래방이나 사인암까지 죄다 등장할 것이다.

 

아, 송어회 먹으러 갈 일도 생기고 염소전골 먹으러 갈 일도 생긴거다. 암튼 대박이다.

축하해요. 아카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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