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고영민]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 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 직원 한명이 사표를 던지고 사라졌다.
거의 십팔,구년을 같이 근무했던 것 같은데 확 갈아엎은 흙처럼 잊혀지게 되었다.
지난 달부터 전쟁이 난다는 둥, 세상에 종말이 온다는 둥 헛소리를 하더니
집도 팔고 이것저것 다 정리하고 증발되었다.
업무도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작년까지만 해도 쓸만한 일꾼으로 올핸 연봉도 조금 올려주어야겠다 했는데
갑자기 속을 썩이고야 만다.
그럭저럭 다른 직원을 설득해서 그 일을 이어받게 하고 조치를 끝냈다.
걱정인 것은 아이들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으니 신문에 날까봐서이다.
믿음도 신실했던 친구였는데 종말론에 빠지더니 그리 되었다.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들이 천천히 잊혀져 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