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만삭[고영민]

JOOFEM 2009. 3. 18. 23:39

 

 

 

 

 

 

 

만삭[고영민]

 

 

 

  새벽녘 만삭의 아내가 잠꼬대를 하면서 운다. 흔들어 깨워보니 있지도 않은 내 작은마누라와 꿈속에서 한바탕 싸움질을 했다. 어깨숨을 쉬면서 울멍울멍 이야기하다 자신도 우스운 듯 삐죽 웃음을 문다. 새벽 댓바람부터 나는 눈치 아닌 눈치를 본다. 작은마누라가 예쁘더냐, 조심스레 물으니 물닭처럼 끄덕인다. 큼직한 뱃속 한가득 불안을 채우고 아내는 다시 잠이 들고, 문득 그 꿈속을 다녀간 작은마누라가 궁금하고 보고 싶다. 잠든 아내여, 그리고 근처를 서성이는 또다른 아내여. 이 늦봄의 새벽녘, 나는 지척의 마음 한자락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제쯤 아내가 숨겨놓은 작은마누라를 내 속으로 몰래 옮겨 올 수 있을까. 번하게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아내의 꿈속을 오지게도 다녀간 사납지만 얼굴 반반한 내 작은마누라를 슬그머니, 기다려본다.

 

 

                                                                                                                                             공손한 손[창비, 2009]

 

 

 

 

 

 

 

* 내게 작은 마누라가 있으면 좋으련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없다.

그래도 아내와 필적할만한 대상은 있다. 막내딸이다.

큰 딸은 초등학교 삼학년때 아빠의 무릎을 떠나갔지만, 아니 떠밀어 냈지만

막내딸은 지금 중삼인데도 늘 안기고 매달린다.

가끔은 누워봐, 명령조로 아빠를 눕혀놓고 흰머리를 뽑는 게 취미다.

아무리 잘 뒤져봐야 스무개 남짓인데 늙은 아빠가 싫었을까, 부지런히 뽑아댄다.

아내는 아내대로 챙겨주는 게 없고 큰딸은 큰딸대로 챙겨주는 게 없지만

막내는 다르다. 생일, 발렌타인데이, 어버이날 등등 애인처럼 챙겨준다.

그러니 작은 마누라는 필요없다. 막내가 그 역할을 대신하니까.......

아마도 막내가 남친을 데려오는 그 날까지는 틀림없이 애인일 게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의 말[마종기]  (0) 2009.03.28
별들을 읽다[오태환]  (0) 2009.03.25
산수유꽃을 보며[조창환]  (0) 2009.03.16
젖 [상희구]   (0) 2009.03.12
홀로움[황동규]  (0) 2009.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