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치약[고영민]

JOOFEM 2009. 4. 25. 12:19

 

 

 

 

 

 

 

 

 

치약[고영민]

 

 

 

 

  한번 짠 치약은 다시 넣을 수 없다

 

  어린 시절 군것질거리가 없어 봄햇살 번지는 담장 밑에 앉아 몰래 치약을 먹은 적이 있다 손 끝에 조금 짜서 먹었더니 입안이 화하고 참 달달했다 조금 더 짜서 먹고 조금 더 짜서 먹다보니 나중엔 치약 한 통을 거의 다 먹어버렸다

 

  저녁 무렵, 아버지가 내 뒤꼭지에 슬쩍 한마디를 흘린다, 큰일났네 누가 그 독한 치약을 한 통 다 먹었나봐, 그걸 한꺼번에 먹으면 멀쩡한 어른도 성치 않지, 누군지 모르겠는데 오늘 중으로 물 세 바가지는 먹어야 죽지 않을 텐데 말야

 

  뒤척뒤척 나는 잠을 못이루다가 식구들이 자는 틈을 타 몰래 부엌에 나가 바가지에 물을 떠마시고, 갑자기 방안에서 너 오밤중에 부엌에서 뭐 하냐?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바가지에 얼굴을 박고 꿀꺽꿀꺽 남은 물을 마시는데

 

  어느덧 나도 그 아버지의 나이,

  치약처럼 짜인 아버지는 영영 이세상에 없고

  이 한밤중 나는 무슨 이유로 부엌에 나가 꿀꺽꿀꺽 세 바가지의 물을 혼자 마시고 있나

 

 

 

 

 

 

 

 

 

* 누구나 치약을 먹어본 경험이 있을 게다.

요즘은 계면활성제가 많이 들었다 해서 양치물도 다섯번에서 열번으로 늘려 하고 있으니 먹을 일이 없을 테다.

대개의 집에서 아버지는 장난스레 아이들을 놀린다.

치약 말고도, 다리밑에서 주워 왔다, 친엄마가 지금도 다리밑에서 있다 등등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장난을 하곤 한다.

나도 어릴 때 정말 엄마가 다리밑에서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엄마가 나를 정말 낳았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기때문에 근거없는 다리밑 운운에 쉽게 마음이 흔들렸다.

나도 아이 셋에게 똑같은 장난을 쳤지만 큰애만 살짝 속아주고 나머지는 택도 없다는 듯 웃어넘겼다.

아마 이 아이들도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아이의 아이들에게 그런 장난을 세습할지도 모른다.

한번 짠 치약은 다시 넣을 수 없듯이 한번 가족은 영원한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