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Choiysj
화양연화(花樣年華)*[이병률]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영화감독 왕가위의 작품 제목.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 지나고보면 인생은 화양연화와 같다.
그래서 놓친 버스는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갔지만 내일 새롭게 기차는 다가온다.
빈집에서의 화양연화는 새로운 집에서 새롭게 화양연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어둔 방에서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쌀 일은 아니다.
어제 모처럼 삼십년전의 친구들을 만나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들에 대해 얘기하고
밤새 노래를 불렀다.
불러도 불러도 끝이 나지않는 노래를 부르며 가버린 화양연화를 아쉬워했다.
헤어지기 싫어하다 결국 새벽비를 맞으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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