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녀

JOOFEM 2010. 5. 23. 21:44

 

  하룻밤 잔 댓가로 큰 액수의 수표를 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피아노를 치는 이정재와 자존심 무너지는 전도연.

 

 

 

 

 

영화, 하녀.

일천구백육십년의 작품을 리바이벌한다길래 솔직히 기대가 좀 컸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전도연의 젖꼭지만 본 것은 아닐까, 여성분들은 이정재의 쵸콜릿복근만 본 것은 아닐까 심히 염려되었다.

이정재는 재벌가문으로 태어나 부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가진 남자로 묘사되고 그 집의 하녀인 전도연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집안에서 이정재와 짧은 사랑을 나눈다.

이정재로서는 부인의 성적 부재에 대한 대타로 전도연을 택한 것이고 전도연은 꿈같은 남자를 사랑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부자이고 피아노도 잘 치고 매너가 좋고 근육도 탐나고 카리스마도 있고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남자이기때문이다.

문제는 신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정재는 성골(?)이고  이정재의 부인은 진골(?)인데 전도연은 해골(??)인 까닭이다.

해골이 감히 성골을 사랑할 수 있다니......

이정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정재는 자기의 장모나 부인에게 " 감히 나한테......"라고 말하며 당신들과 내가 신분이 다르다라는 것을 말한다.

장모나 부인조차 그 말에 대꾸를 하지 못한다.

신분의 차이라고 하는 것이 감히 넘겨다 볼 수 없는 높은 담벼락인가보다.

부도 세습되지만 빈곤도 세습된다.

그것은 신분이 세습되는 까닭이다. 물론 부자가 망해서 거지가 될 수도 있고 거지가 일확천금을 얻어 부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예외없이 세습된다.

전도연은 마지막 장면에서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해,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분하고 슬퍼서 잔인하게 자학하며 자살을 택한다.

이정재의 가족, 즉 성골과 진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매달고 그것도 부족해서 분신까지 하며 삶을 마감한다.

그렇게 자학하며 자살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과 동(同)으로 살아가기때문이다.

 

계급사회는 평등한 사회에서도 존재한다.

공산사회인 북한에서 당원들은 부를 누리며 사회주의인 중국에서도 일부 지배계층이 부를 독점하며 산다.

작은 사회이든 큰 사회이든 계급은 존재하며 그 계급을 타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가진 자가 그 가진 것을 나누는 사회,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좋은 일에 쓰는 사회,

감히,라고 말하지 않으며 뺨을 후려치는 폭력을 일삼지 않는 사회,

그리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똑같이 존엄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것을 이 영화, 하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요즘 개봉된 영화, 시에서도 그렇고 자기 뜻과 다르다고 해서 세상이 그것을 몰라준다고 해서 함부로 생명을 내버리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영화화되는 것이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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