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 [이병률]
감 하나 서리한 날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덜컹하는 바람에
서리한 감이 앞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어느 정도는 뒷자리여서
또 사람들이 많이 타기도 해서
나를 신경쓰지 않겠다 싶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방이 기울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감을 봤는지
빈 내 옆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어르신이 더 신경을 쓰는 듯 했다
감도 여행을 하는 중인 거야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졸았다
버스가 도착하는 것 같아 눈을 뜨려는데
옆 옆 자리의 어르신이 손을 뻗어 나를 툭 치더니가리
키는 게 있었으니
발밑에는 가만히 돌아와 멈춰 선
감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문학과지성사, 2024
* 누군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고
누군가는 나를 향해 기도하고 있고
누군가는 나를 도와주려고 마음을 써주고 있고
누군가는 나에게 값없이 베풀어주는 이도 있고
그 모두가 낮달처럼 드러내지 않고 나를 사랑해 주지만
나는 그 모든 사랑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알아서 갚기도 하지만 몰라서 지나가기도 하고
사랑은 알다가도 모르고 모르다가도 알게 되는 것.
낮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고
내가 낮달을 올려다볼 때
교감이 있는 사랑이 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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