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낮달 [이병률]

JOOFEM 2024. 4. 30. 22:16

낮달, 노명희 화가 그림

 

 

 

 

 

낮달 [이병률]

 

 

 

 

 감 하나 서리한 날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덜컹하는 바람에

 서리한 감이 앞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어느 정도는 뒷자리여서

 또 사람들이 많이 타기도 해서

 나를 신경쓰지 않겠다 싶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방이 기울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감을 봤는지

 빈 내 옆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어르신이 더 신경을 쓰는 듯 했다

 

 감도 여행을 하는 중인 거야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졸았다

 버스가 도착하는 것 같아 눈을 뜨려는데

 옆 옆 자리의 어르신이 손을 뻗어 나를 툭 치더니가리

키는 게 있었으니

 

  발밑에는 가만히 돌아와 멈춰 선

  감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문학과지성사, 2024

 

 

 

 

 

 

 

 

 

* 누군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고

누군가는 나를 향해 기도하고 있고

누군가는 나를 도와주려고 마음을 써주고 있고

누군가는 나에게 값없이 베풀어주는 이도 있고

 

그 모두가 낮달처럼 드러내지 않고 나를 사랑해 주지만

나는 그 모든 사랑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알아서 갚기도 하지만 몰라서 지나가기도 하고

사랑은 알다가도 모르고 모르다가도 알게 되는 것.

 

낮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고

내가 낮달을 올려다볼 때

교감이 있는 사랑이 될 게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착齷齪 [권혁웅]  (1) 2024.05.05
리얼리티 [전욱진]  (0) 2024.05.04
내면의 방 13도 [최돈선]  (0) 2024.04.27
풀밭나라에서 안부를 [이기철]  (1) 2024.04.21
하루 종일 궁금한 양초 [강우근]  (0) 2024.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