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14

백색공간 [안희연]

백색공간  [안희연]    이누이트라고 적혀 있다 나는 종이의심장을 어루만지는 것처럼그것을 바라본다 그곳엔 흰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설원을 달리는 내가 있다 미끄러지면서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글자의 내부로 들어간다 흰 개를 삼키는 흰 개를 따라다시 흰 개가 소리 없이 끌려가듯이 누군가 가위를 들고 나의 귀를 오리고 있다흰 개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긴 정적이단 한 방울의 물이 되어 떨어지는이마 나는 이곳이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았다 종이를 찢어도 두 발은 끝나지 않는다흰 개의 시간 속에 묶여 있다                 -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8         * 썼던 글이 '삭제' 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삭제될 때가 있다.머릿속이 하얘진다.다시 그글을 떠올리며 써보지만 원래의 글과는 ..

시와 감상 11:32:56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신용목]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신용목]   열아홉의 내가  자신의 미래를 보고 싶어서  삼십 년을 살았다  내 미래는 이런 거였구나, 이제 다 보았는데  돌아가서  알려주고 싶은데, 여전히 계속되는 시속 한 시간의 시간 여행을 이제 멈추고  돌아가서  알려주면, 열아홉의 나  자신 앞에 놓인 삼십 년의 시간을 살아보겠다 말할까아니면  살지 않겠다 말할까  까만 먹지 숙제에 영어 단어 대신 써 내리던 이름과 아무렇게나 쓰러뜨린 자전거  바큇살처럼 부서지는 강물을 내려다 보며, 물은 흐르는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끝없이 뛰어내리는 거라고  생각하던 긴긴밤으로부터  나는 겨우 하루를 살았는데, 생각 속에서 삼십 년이 지나가고  넌 그대로구나  꿈에서는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지낸 삼 년을..

시와 감상 2024.09.16

복희 [남길순]

복희 [남길순]      복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   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닿고 있다   호숫가를 한바퀴 도는 동안  내 걸음이 빠른 건지 그들과 만나는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는데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  희미한 달이 떠 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                  - 한밤의 트램펄린, 창비, 2024        * 매운 음식을 많이 먹어서일까?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졌다.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는데 하루종일 쉬지않고 시끄럽다...

시와 감상 2024.09.13

달과 돌 [이성미]

달과 돌 [이성미]    돌이 식는다밤의 숲 속을 헤매다 주운창틀 위에 올려놓은 돌이 식는다어두운 방에서 빛나던 돌가만히 보면 내 눈썹까지 환해지던 그 둥근 빛 아래서나의 어둠을 용서했고침묵은 말랑말랑한 공을 굴렸다 들고양이가 베고 잤을까고양이의 꿈을 비누방울로 떠오르게 하던돌이 식는다 자줏빛 비가 내리고벼락의 도끼날이숲의 나무들을 베어버리는 동안돌 위에 얹고 있는내 손이 식는다 반달의나머지 검은 반쪽이궁금해졌다                -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문학과지성사, 2005         * 꿈도 사랑도 우정도 식어간다?돌이 가지고 있는 온기는 내가 유지해주지 않으면 반드시 싸늘하게 식을 게다.마음의 온기조차 식어간다면 돌뿐만 아니라 꿈도 사랑도 우정도 식어갈 게 자명하다.포물선을 그리는..

시와 감상 2024.09.08

시 속의 시인, '서정주'

모래로부터 먼지로부터 [장석원]   천원 한 장을 구걸하는 남자 떠오른 돌멩이 같은 비둘기들 처음 와본 것 같다 어떤 명령에 의해 걸음을 멈추었을까 뒤를 돌아본다 움푹 패어 있다 한 움큼 뽑혀나간 듯하다 광장은 쪼개지는 곳 바람이 그러하듯 광장은 중심을 지나지 않는다 바람과 햇빛, 습도와 명암까지 똑같다 지루하고 무한한 한 번의 삶이었지만 걸인이기도 하고 한 그루 나무이기도 하고 첨탑에 걸린 구름이기도 하지만 지워진 얼굴로 여기까지 걸어왔지만 횡단하는 비둘기로 가득 찬 하늘 밑에서 잠을 생각한다, 사랑의 복습을 꿈꾼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또한 아무것이기도 했다 서울역 광장의 남측면에 자리잡은 매점 앞 여섯시의 저무는 태양 아래 나는 가만히 서 있다 라디오에서 시보가 흘러나온다 라디오는 모든 것..

詩人을 찾아서 2024.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