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일없다 [오탁번]

JOOFEM 2024. 5. 21. 18:44

 

 

 

 

 

일없다 [오탁번]

 

 

 

 

애련리 한치마을

큰 느티나무 앞 폐교에는

바람이 불고 낙엽이 날리고

새소리만 들리는 적막뿐이었다

오석烏石에 새긴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가

번개치듯 내 눈에 들어왔다

교실 세 칸에 작은 사택

다 주저앉은 숙직실과

좁은 운동장이

옛동무처럼 낯익었다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을 살려

'원서헌'遠西軒이라 이름 짓고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을 잔다

먼 서녘, 원서는

종말이 아니라

새날의 시초라고

굳이 믿으면서

스무 해 되도록

이러구러 살고 있다

 

서울 친구들은

낙향해서 괜히 고생하는 내가

좀 그래보이겠지만

수도가 터지고

난방이 잘 안 돼도 일없다

두더지가 잔디밭을 들쑤셔도

사람보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자주 와도 다 일없다

 

 

                 - 속삭임, 오탁번 유고시집, 서정시학, 2024

 

 

 

 

 

 

 

 

* 오탁번시인과의 첫번째 인연은, 홍정순시인이 등단할 때

시사랑회원들이 축하하러 갔다가, 우리 테이블에 오셔서

말씀은 한마디도 안하시고 찬찬히 우리를 관찰하셨댔다.

맑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뽀빠이처럼 앉아계셨었다.

두번째 인연은 원서헌에서 시에 대한 강의를 하실 때

시사랑회원들이 우르르 갔었댔다.

대부분 남아서 술도 마시며 일박도 했었다.

차디찬 마룻바닥을 걱정하며 동송님이 실내화를 보내주셨었다.

세번째 인연을 이어가지 못하고 속삭임 없이 하늘로 가셨다.

 

몇학번이세요?라고 물으면

- 나, 오탁번이야!라고 하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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