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허공에 매달린 사람 [이근화]

JOOFEM 2024. 5. 9. 17:56

 

 

 

 

 

허공에 매달린 사람 [이근화]

 

 

 

 

  창 너머의 것들을 외면할 것. 닫힌 창 앞에서 그의 일은 시

작되었다. 온몸에 줄을 걸고 허공에 매달린 그는 정확히 아

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일정한 순서로 반복되는 동작들

앞에서 유리는 순한 동물의 눈빛 같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먼 채 허공에 열려 있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저 혼자 익어가듯이.

 

  오늘 빌딩은 그를 매달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곡예가 창을 지웠다. 창밖의 풍경은 선명해질 것이다. 더러

움과 먼지와 얼룩이 없다면 이 세계를 어떻게 실감할 것인

지. 누구와 무엇과 눈을 맞추어야 하나. 그가 웃으며 위태롭

게 흔들렸다.

 

  한층 한층 다정한 자세로 내려갔다. 그가 지운 얼룩은 내

가 오래도록 서 있던 배경이었는데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깨끗해진 창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발밑이 서늘해졌

다. 육지에서 멀미를 하는 뱃사람처럼 그도 지상에서 잠깐

흔들릴 것이다.

 

  휘청거리는 그를 따라 젖은 발을 말리러 가고 싶은 저녁,

허공을 가만히 더듬어보았다. 그가 애써 외면했던 것들이

나라면 내가 죽자고 들여다본 것은 그의 빈 자리. 이제 막 사

랑을 끝낸 사람처럼 허공에 단단히 매달려 있었다.

 

 

                    -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창비, 2021

 

 

 

 

 

 

 

*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도 외줄이라면,

올라갈 것인가 내려올 것인가 번민할 것이다.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쉽지 않아 줄 하나에 대롱거린다면,

한마디로 위태로울 것이다.

인간도 위태롭지 않기를 바라는 게 틀림없다.

안정의 욕구랄까.

 

군대에서 훈련할 때는 이 절벽에서 저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훈련을 한다.

아찔하지만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이라 뛰어내렸을 뿐이다.

해외 출장간다고 열세시간씩이나 허공에 떠서 독일도 가고 체코도 가고 이란도 갔다.

비행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상황이라 탔을 뿐이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절벽도, 탑승도 거절했을 것이다.

고층빌딩의 더러운 유리창을 닦을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줄에 매달고 닦으라고 하면 

상황이 그래서 허공에 떠서 유리창을 닦겠지만

다행히, 정말 다행히 그런 상황이 오지 않을 것이라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오, 허공에 매달린 사람이여!

내 대신 유리창을 맑게 해주고 당신의 안위가 안전하고 안정되길 기도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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