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나비를 보는 고통 [박찬일]

JOOFEM 2024. 5. 18. 09:23

 

 

 

 

 

나비를 보는 고통 [박찬일]

 

 

 

 

*

혼자 날아다니다, 흙에서 흙에서 뒹굴다, 가는 나비여.

 

날개가 아니라 몸뚱어리라는 것을.

그가 날갤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것을.

내 진작 알았더라면

 

날개가 몸뚱어리에 붙은 어떤 단어라는 거.

내 진작 알았더라면

 

몸뚱어리가 가니까 날개가 따라 접히는 것을.

내 진작 알았더라면

 

혼자 다니다 흙에 뒹굴다 흙에 뒹굴다 가는 나비에,

나비 운명에,

내 가까이 가지 않았을 텐데.

 

하늘하늘 날아다니다가, 하늘―하늘을 궁금해 하다가,

평생 다 보낸 자

 

하늘 아래 것 다 놓친 자

 

물구덩이에 빠졌다,

물구덩이에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나비의 원수가 날개―

나비의 원수가 하늘

 

 

*

검은 제비나비가 무릎 아래에서 펄럭거리고 다니는 것은

벌레를 잡숫기 위해?

천만에! 땅에 대고 싶어서다

땅에 기대어

저 무한 낭떠러지 공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팔 랑 팔 랑

팔 랑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가라앉는 나뭇잎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줄행랑치고 있는 것이

무릎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다

 

삼켜질 데가 없는 공간으로부터

삼켜질 곳을 찾아서.

 

 

하늘에 날개가 닿았다

꺼칠꺼칠한 곳이 있었고 말랑말랑한 곳이 있었다

말랑말랑한 곳에 걸쳐 앉았다

바깥에서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침을 발라, 구멍을 뚫고, 보니까

하늘 바깥에

하늘이 있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동안 헛고생한 거다

하늘에 가면 다 가는 줄 알았는데

도달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늘 바깥에 또 하늘이 있었다니

길 떠나지 말라고 한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걸까

하느님이 둘 이상이라는 것을

 

 

                  - 시와세계, 2024 봄호

 

 

 

 

 

 

 

* 나비는 자유롭다고?
나비는 돌아갈 집이 있을까?
집으로 가면 가족이 있을까?

날갯짓이 끝나는 날에 죽는 것일까?

우아하게 날아다니며 널려있는 꽃에 빨대를 꽂고 배부르게 사는 줄 알았는데
왠지 슬프게 보이기도 하고 
다음 생에 태어나면 새가 되어 덜 슬플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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