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순진한 삶 [장수진]

JOOFEM 2024. 7. 20. 17:43

 

 

 

 

 

순진한 삶 [장수진]

 

 

 

 

  끝없이 내린 첫눈 속에 잠긴, 작은 짐승. 곁에는 수분

이 바싹 마른 수국 한 묶음이 쓰러져 있다. 이 거리의 오

래된 소설, 영화, 편지, 시는 끝났다. 너는 오늘도 사라진

흑백영화 속에서 무언갈 찾는다. 익숙한 골목과 재킷, 슬

로와 폭발.

 

  끝에 파도가 쳤지.

 

  주인공의 볼품없는 몸이 훤히 드러난 그 장면에서 너

는 계급과 인종에 대해 잠시 생각했지만 결국엔 파도가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파도만 보게 되었다. 파 도 파 도

미 도. 단순한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흥얼거리며 너는 파

도를 이끌고 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짧은 팔, 굵은

목, 뜻밖의 단정한 말들 소진된, 사람들.

 

  비닐 장갑 위에 놓인 병든 아버지의 불알처럼 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을 살아간다. 간판만 남은 영화관에

쪼그려 앉아 팥빵을 문지르던 금 간 손과, 멋없는 금은방,

두엇 앉은 벤치, 두엇 누운 공원 주변을, 죽음, 죽음, 곱씹

으며 걷는다.

 

  안개 낀 겨울의 날씨, 가벼운 눈발에 쓸려 귓불에 피가

번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안부를 물으려 했는

데 · · · · · · 숨길 수 없는 나의 얼룩, 당황하려나  · · · · · ·

굶주린 들개라도 껴안을 수 있다면  · · · · · ·

 

  시시한 시 허풍을 떨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그 딱딱한

허무를.

 

  한참을 헤매다 도착한 작은 정원에서 언 사과를 콱 깨

물어 먹던 순간에 너는 정갈한 도서관이나 심리 상담, 복

지, 공부,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래

를. 고요하고 깨끗한 겨울나무 곁에서.

 

  오늘 아버지는 네가 만든 커다란 식빵에 한 손을 푹 찔

러 넣은 채로 문장을 말씀하신다.

 

  "얘야, 그 오븐을 끌어다 내 무릎을 덮어 주겠니. 날

이 춥구나."

 

 

                 - 순진한 삶, 문학과지성사, 2024

 

 

 

 

 

 

* 순진한 삶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삶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이다.

'noon of life'

정오의 삶을 넘어선 이후는 그저 내리막 길만 있을 뿐이다.

오십이면 시속 오십으로, 육십이면 시속 육십으로 시간이 빨라진다.

순식간에 노인이 되고 병상에 누워 

창밖의 겨울나무을 바라보게 되며 오븐을 이불로 착각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점점 노령화가 되어 노인천국이 되었다.

노인들은 날마다 에스알티를 타고 병원을 다닌다.

전국 각지에서 병원으로 모이니 에스알티 타기가 정말 어렵다.

노인들은 아프다. 그러니 병원을 다니고 그래서 힘도 많이 든다.

순진하기보다는 단순해서 서울로, 서울로 몰려든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정 온도 [조온윤]  (0) 2024.07.25
시작 [박지혜]  (4) 2024.07.24
그림 없는 미술관 [주민현]  (2) 2024.07.14
러스크 [김미량]  (0) 2024.07.11
지속 가능한 이야기를 찾아서 [주민현]  (0) 2024.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