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시작 [박지혜]

JOOFEM 2024. 7. 24. 11:49

 

 

 

 

시작 [박지혜]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햇빛부터 시작하는 게 좋

겠다고 했다 질경이가 좋겠다고 했다 투명한 유리병

이 더 낫겠다고 했다 하얀 말을 따라가고 싶다고 했

다 그냥 노래를 부를까 노래를 부르느니 물로 들어

가겠다며 발끝을 바라본다 몽환적이라는 말을 좋

아하느냐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든 말에 속고 있다

고 했다 차라리 일요일의 햇빛을 생각하겠다고 했다

무심한 지렁이를 생각하겠다고 했다 가벼움에 대한

얘기를 다시 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가볍고 빛나게

떨어지고 있는 고독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텅 빈 모

음만을 발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잊히지 않는

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만 사는 섬에서 나오지 않았

다 흐린 눈빛의 그들은 언덕을 그리거나 나무를 심

거나 물고기를 불렀다 물빛을 닮은 눈빛은 항상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곳을 말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을 따라가고 싶기도 하다며 희미하

게 웃었다 더 웃거나 웃지 않는 방법에 대해 생각 중

이라고 했다 너는 담배를 입에 물고 나는 스타킹을

끌어올리며 다리를 뻗었다 쉬지 말고 계속 얘기를

하자고 했다 어제는 모순을 끌고 가는 아름다운 너

를 보았지 오늘은 태양을 한없이 바라볼 거야 무언

가 오래 바라보는 일은 자랑할 일이라고 모든 건 사

랑 때문이라고 설명 없이 우겼다 비밀의 풀을 본 일

이 있니 비밀의 풀이라는 표현이 싫다고 했다 소용

돌이치는 물로 들어가는 여자를 따라간 일이 있니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불안해

도 괜찮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북극에 가는

건 어떻겠느냐고 들뜬 아이처럼 말했다 털이 많은 

동물을 상상하자고 했다 북극의 하지의 환한 밤을 

상상하자고 했다 그런 건 혼자 하라며 문을 열었다

그럼 해 넘어가는 하늘은 어떨까 물었다 서로가 닮

아 있었다 드디어 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이

제부터 입을 열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 햇빛, 문학과지성사, 2014

 

 

 

 

* 예전에는 금계국을 보러 일부러 천흥저수지를 갔었다.

저수지를 막고 있는 뚝방은 좌우측으로 금계국이 해마다 지천이었다.

빨간 지붕의 빌라도 예쁘장하고 

찰랑거리는 물도 보기에 좋았다. 

입구에는 등산로로 이어지는데 벤치가 하나 길손들을 쉬게 해주었다.

앉아서 쉴 때 눈앞에 펼쳐지는 건 질경이들이다.

벤치 앞에 일가를 이루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물론 등산객들이 밟고 또 밟고 그래서 상흔들이 있지만

식물이름이 질기다는 뜻으로 질경이이니 그정도쯤이야 견딜만 한가보다.

저수지를 한바퀴 둘러보는 것도 좋다.

가본지 삼년쯤 되었을까, 커피 내리는 집이 있으면 자주 갔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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