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을 찾아서

시 속의 시인, '천상병'

JOOFEM 2024. 9. 7. 09:34

 

 

 

 

 

천상병 씨의 시계 [김규동]



어려운 부탁 한 번 한 뒤면
주먹만큼 큼직한 동작으로
저고리 소매를 걷어올리고
시계를 봤다
칠이 벗겨진
천상병 씨의 시계에
남도 저녁노을이 비꼈다
시계 없이도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노라고
얼어드는 언어의 층계를 오르내리는 내게
천상병 씨의 낡아빠진 시계는
어째서 자꾸
뭉클한 감정만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일까.

 


                -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년

 

 

 

 

인사동 사람들 [오탁번]

 

 

 

 

인사동에 가면

이 사람 저 사람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

중앙일보 손기상 선배도 가끔 만났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는

투고할 때의 제목은 「겨울 아침행」이었는데

문화부 젊은 기자였던

그가 바꾼 것이었다

아아, 반세기가 다 돼가는구나

시인, 교수하면서 내가 나를 탕진했듯

문화부장, 논설위원하면서

그도 그를 다 소진했는가

요즘은 만나는 일이 없다

낭만파 문화인들은

금주금연하며 깡그리 잠적하였는가

천상병, 김종삼한테 부끄럽지도 않은가

망년회와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인사동 사람들, 지리산, 장자의 나비

만나면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이젠 잘 보이지 않는다

귀가 웃는 임영조가 가고

단호박 같은 신현정도

갓김치처럼 매운 송명진도 가고

풍문 만들던 박남철도 갔다

다 갔다

사람이 없는 인사동 길을

나 혼자 노량으로 거닐다가

뒷골목에 숨어서

흘끔흘끔 도둑담배 피운다​

 

 

 

 

당나귀 [류시화]

 

- 천상병 시인,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거기서도

  시를 쓰고 있는가

 

1.

당나귀는 가난하다

아무리 잘생긴 당나귀라도 가난하다

색실로 끈을 엮어

목에 종을 매달고도 당나귀는 대책없이 남루하다

해발 5천 미터

레에서 카루등라 고개를 넘어 누브라 밸리까지

몇 날 며칠을 당나귀를 타고 간 적 있다

세상의 탈것들은 다 타 보았지만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나귀 등에 한 생애를 얹고 흔들리며 벼랑길 오르는 동안

청춘을 소진하며

어찔한 화엄의 경계 지나오는 동안

한 소식 한 당나귀에게서 배웠다

희망에 전부를 걸지도 않고

절망에 전부를 내주지도 않는 법을

그저 위태위태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당나귀여, 너는 고난이 멈추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도 너처럼 몇 생을 후미진 길로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곳이 폐허는 아니었다

자학이 아니라 자족이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너무 오래 걸어 무릎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이었다

나의 화엄은 당나귀와 함께 벼랑이었다

 

2.

인사동 귀천에서 만난 한 시인은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절망의 힘으로도 끌고 가기 힘들다고

밖으로 나오니

새 한 마리

가볍게 생을 끌고 피안으로 날아간다

일생의 힘으로 시를 끌고 간

천상병 시인이 눈 내리는 귀천을 끌고 턱없이 웃으며

하늘 모퉁이로 가고 있다

시보다도

한 생을 끌고 가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인사동 벗어나기 전 뒤돌아 보니

눈보라 속 당나귀들이

저마다 자신을 지고 서역의 고개를 넘고 있었다.

 

 

 

 

거지 시인 온다 [김규동]

 

 

철없는 모더니스트 시절

명동에서

내 친구들이

새까만 얼굴의

천상병이 나타나면

야,저기 거지 시인 하나 온다라고

우스갯소리 했지요

상대 나왔다는 친구가

뭐 저러냐

너 또 200원 줘라

그러잖아도 너 알아보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빈정댔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때 천상병이를 거지 시인이라고 놀려주던 친구들은 다 시인이 못되고

천상병이는 시인으로 남게 되었군요

영원히

 

 

 

 

 골목길 [정호승]

 

 

 

 

그래도 나는 골목길이 좋다

서울 종로 피맛골 같은 골목길보다

도시 변두리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블록담이 이어져 있는 산동네

의정부 수락산 밑

천상병 시인의 집이 있던 그런 골목길이 좋다

담 밑에 키 큰 해바라기가 서 있고

개똥이 하늘을 쳐다보다가

소나기에 온몸을 다 적시는 그런 골목길이 좋다

내 어릴 때 살던 신천동 좁은 골목길처럼

전봇대 하나 비스듬히 서 있고

길모퉁이에 낡은 구멍가게가 하나쯤 있으면 더 좋다

주인 할머니가 고양이처럼 졸다가 부채를 부치다가

어머니 병환은 좀 어떠시냐고

라면 몇 개 건네주는 

그 가난의 손끝은 얼마나 소중한가

늦겠다고 어서 다녀오라고 

너무 늦었다고 어서 오라고 안아주던 

어머니의 그리운 손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어느 술꾼이 노상방뇨하고 지나가는

내 인생의 골목길이 좋다

 

 

              -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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